이순신 장군의 서번트리더십 (3) – 변명규
먼저 1593월 1월26일 피난민에게 돌산도에서 농사를 짓도록 명령해주기를 청하는 장계(請令流民入接突山島耕種狀)를 보자. 첫 번째 장계를 올린 때는 한산도에 행영(行營)을 설치하기(7월 15일) 이전이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도(8월15일) 전이었다.
“당장 눈앞에서 피난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참상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전일 풍원부원군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로 인하여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 중에, ‘여러 섬 중에서 피난하여 머물며 농사지을 만한 땅이 있거든 피난민을 들여보내 살 수 있도록 하되 그 가부(可否)는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기에, 신이 생각해본바 피난민들이 거접(居接)할만한 곳은 돌산도(突山島)만한 데가 없습니다. 이 섬은 본영과 방답 사이에 있는데 겹산으로 둘려싸여 적이 들어올 길이 사방에 막혔으며, 지세가 넓고 편평하고 땅도 기름지므로 피난민을 타일러 차츰 들어가서 살게 하여 방금 봄갈이를 시켰습니다.” `
그 다음 1593년 윤11월17일 장계(請設屯田狀)는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수군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내용으로 둔전을 설치할 장소, 농군을 동원할 방법, 소득을 분배할 방법까지도 세밀하게 건의하고 있다.
“여러 섬 중에 비어있는 목장에 명년 봄부터 밭이나 논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되, 농군은 순천, 흥양의 유방군(留防軍)들을 동원하고, 그들이 전시에는 나가서 싸우고 평시에는 들어와 농사를 짓게 하자는 내용으로 올렸던 장계는 이미 승낙해주셨고, 그 내용을 하나 하나들어 감사와 병사에게 공문을 보냈습니다. (중략) 순천의 돌산도 뿐만 아니라 흥양의 도양장, 고흥의 절이도, 강진의 고이도(완도군 고금면), 해남의 황원목장 등은 토지가 비옥하고 농사지을 만한 땅도 넓어서 무려 1천여 섬의 종자를 뿌릴만한 면적이니, 갈고 씨뿌리기를 철만 맞추어 한다면 그 소득이 무궁할 것입니다. 다만 농군을 동원할 길이 없으니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경작하게 하고, 그 절반만 거두어들이더라도 군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략) 그리고 20섬의 종자를 뿌릴만한 면적의 본영 소유 둔전에 늙은 군사들을 뽑아내어 경작시켜 그 토질을 시험해 보았더니, 수확한 것이 정조(正租, 벼)로 500섬이나 되었습니다. 앞으로 종자로 쓰려고 본영 성내 순천창고에 들여놓았습니다.”
과연 이순신이 전쟁하는 장군인지 농사짓는 농군인지 참으로 최고지휘관 CEO로서 둔전정책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뿐인가? 1594년 1월10일 흥양목관 차덕령이 둔전경영을 태만히 한다는 이유로 교체해줄 것을 요청하는 장계(請改差興陽牧官狀)도 있었다.
한편 바다의 자원도 적극 활용했다. 수군으로 하여금 고기잡기 특히 당시 많은 청어를 잡아 수군의 영양을 보충했고, 해조류, 소금을 생산하여 곡식으로 바꾸는 등, 다양하게 군량확보를 해 나갔다.
5) 침과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전쟁에 대비했다.
‘침과’는 본래 ‘진서’와 ‘세설신어’에 나오는 진나라 장수 유곤의 말에서 유래했다. 유곤은 젊어서부터 이민족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는 꿈을 갖고, “나는 언제나 창을 베고 잠을 자며 오랑캐를 섬멸할 날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 뒤로 침과는 긴장하고 대비하여 자세를 나타내는 의미어로 쓰여 왔다. 복수에 복수가 오고 가는 와신상담의 고사와 흡사하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도 침과와 이를 무시했던 사람들이 겪는 교훈이 종종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임진왜란 때다. 당시 조정이나 백성들은 일본에 대하여 전혀 대비가 없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전라좌수사(1591년 2월 임명)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부터 늘 침과했던 것이다. 거북선 개발, 장병 훈련, 군량 확보 등이 그것이었다.
이순신이 사천해전에서 왼쪽 어께에 관통상을 당하고서도 갑옷을 벗지 않고 지냈다. 다시 침략할 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한산대첩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명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군사를 다스리고 군대를 정비하여 창을 베개로 삼아 변을 기다려 다시 통고하는 즉시 수군을 거느리고 달려오라.”
명량해전에서도 그의 침과는 진가를 발휘했다. 명량해전 10일 전 일기에서 침과하는 이순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난중일기 1597, 9, 7. 생략>
일본군이 이순신의 수군을 기습했지만 이미 일본군의 기습을 예측하고 침과하고 있던 이순신이 철통 수비를 하고 있었기에 일본군은 대패하고 도망치는 데 급급했다. 침과 앞에 적의 기습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6) ‘지피지기’보다 ‘지기지피’를 강조했다.
손자병법에는 ‘지피지기’라고 되어있으나 이순신은 ‘지기지피’라고 했다. 잘못 알고 그랬을까?
손자병법은 조선 시대 무과시험의 필수과목이었고, 장수들의 필독서였으며 문신과 왕들도 공부했던 책이다. 이순신은 손자병법의 중요한 원칙을 난중일기에 수시로 인용했고, 실제 작전을 펼칠 때도 충실히 따랐다. 그런 것으로 보아 난중일기의 지기지피는 의도적이라는 것이다. 이순신은 ‘자신을 아는 것’을 중요시 한 게 틀림없다. 당시 일분군에 비해 모든 것이 열세인 전쟁 상태에서 우리나라 우리 군의 상황을 먼저 정확하게 아는 것이 급선무였다고 판단했음에 틀림없다. 조선군은 오랜 평화에 젖어 무력하기 짝이 없었고, 나라의 대부분을 빼앗긴 데다가 살길이 막막했던 백성의 처지를 감안할 때 먼저 우리들의 강점을 찾아내는 게 급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강점을 살려 용기를 북돋우고 최대한 활용하여 전쟁의 바탕으로 삼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피보다 지기를 앞세운 것이라 생각된다. 이에 앞서 류성룡도 지기지피를 주창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 원인이 장수들의 병법에 대한 무지함에 있다고 분석했다. 리더이기에 먼저 그 조직을 발전시킬 선각자로서 지식과 지혜를 발휘해야 리더중의 리더로 도약할 수 있는 것이다.
7) 필사즉생보다 필생즉사를 강조했다.
명량해전 전날 이순신이 부하 장졸에게 연설하면서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다.”<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이 말은 원래 ‘오자병법’ 중 ‘치병’에 나오는 “무릇 전쟁터는 시체가 뒹구는 곳이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아날 궁리를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했는데 이순신은 더 강력하게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라며 온 힘을 다해 싸울 것을 요구했다. 그런 것이 엄청난 열세에서도 승리의 기적을 이룬 요소인 것이다.
8) 울어야 할 때는 참지 않았다
눈물과 울음은 웃음만큼 명약이다. 적과의 긴박한 대치상황에 있던 이순신은 꾸역꾸역 울음을 참아 내는 오늘날의 우리와 달리 자주 눈물을 흘렸다. 그는 시련, 이익, 출세 때문이 아니라 가족 걱정(특히 어머니), 전쟁으로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 걱정, 백성과 군사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걱정으로 울었다. 그의 울음은 사람에 대한 사랑, 장수로 적에 대한 분노, 리더로서의 책임감과 열정에서 솟구치는 피눈물이었고, 가슴에서 고동치는 열망의 외침이었다.
늦게 영남수사와 선전관 성문개가 찾아와 만나니 피난 가신 임금님의 사정을 자세히 전했다. 통곡을 참을 수 없었다, <준중일기 1593년 5월 12일>
초불 켜고 홀로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난중일기, 1595년 1월 1일>
1957년은 더욱 고통의 해였다. 그 시기의 일기를 보면 지극한 효자 이순신, 어버이 이순신의 절절한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월에는 왕명거부 죄로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사형의 위기를 겪었고, 4월에는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만은 건기고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노모는 그런 이순신을 만나러 가다가 험하고 먼 뱃길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순신은 어머니를 차가운 시신으로 맞아야 했고, 천명을 받들기 위해 장례도 채 다 마치지 못한 채 백의종군의 길을 떠나야 했다.
일찍 나와 길을 떠났다.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하늘과 땅 사이에 나와 같은 일이 어디 있을까. 어서 일찍 죽는 것만 못하구나. <난중일기, 1597년 4월 19일>
이날 밤은 달빛이 대낮같이 밝았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슬피 우느라 밤늦도록 잠들 수가 없었다. <난중일기, 1597년 7월 9일>
이덕필, 변홍달이 와서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당해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가 이억기, 충청수사와 여러 장수가 많은 해를 당했고 수군이 대패했다.”고 했다. 통곡을 참을 수 없었다. 동공이 터져 나왔다.<난중일기, 1597년 7월 18일>
내일이면 막내아들의 죽음 소식을 들은 지 3일째인데도 마음 놓고 통곡도 하지 못해 염간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난중일기, 1997년 10월 16일>
조용한데서 마음놓고 울거 싶었던 것이다.
9)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니체는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태에서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이순신은 “인생이란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다. 사람으로서 한 번 죽는 것 아까울 것이 없다.” 그러면서 그는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죽을힘을 다해 충성하고,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살면 또한 족하다.”
이순신은 극한의 위험한 순간에도 오히려 승리의 꿈을 더 강렬하게 꾸었다. 그 승리는 자신만의 승리가 아니라 모두의 승리를 위해 죽음의 심연에 가장 먼저 자신을 내던졌다. 그가 독후감에서 쓴 “죽음 속에서 살 길을 찾으면 만에 하나라도 혹시 나라를 건질 방도가 있을 것”이란 말은 지독한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만드는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