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20) 문신이자 학자, 서예가였던 신재 주세붕
신재 주세붕(1495~1554), 그는 조선 초기 풍기군수, 성균관사성,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였으며 서예가였다.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이다. 고려 말에 고조가 경상도 합천에 우거했다. 증사복시정 주상빈(周尙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장손(周長孫)이고, 아버지는 주문보(周文俌)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알려져있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해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했다.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으며 1537년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다. 이듬해 검시관(檢屍官)으로 남형을 한 상관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여묘 3년, 상제(喪祭)의 예는 모두 『가례(家禮)』에 따랐다. 승문원교리·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었다.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주 01)을 건립했는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 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만한 인물이라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했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풍기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OOO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