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39) – 하재효 논설위원
8. 최치원 선생이 해인사에 남긴 흔적
(12) 고운 최치원 선생과 청량사(淸凉寺)
필자가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이 되니까 약 60여년 전의 일이다. 소인이 다니던 중학교(야로중)에서 약 30리 길이 족한 남산절(청량사)에 소풍을 갔다. 왕복 60리 자갈길을 걸어서 가자니 아침 일찍 출발하였으리라 추측되며 우리를 먼 곳으로 인도하는 선생님들께서 각오를 단단히 하셨으리라! 나에게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몇 가지 적을 수 있게 하여 주신 당시의 선생님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청량사 축대 이야기> 청량사 마당 끝의 돌 축대는 얼마나 높은지 그 끝에서 밑을 내려다 볼 수 없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배를 땅에 대고 일자로 누워서 겨우 밑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나는 요즈음도 청량사에 가면 그 돌담 축대를 살펴보곤 하지만 지금의 축대는 어릴 적의 기억에 못 미친다.
<노루와 호랑이 이야기> 청량사 마당에 모여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데 그 많은 사람 사이로 노루 한 마리가 뛰어들었다. 동쪽 산 기슭에서 뛰어온 노루는 서쪽으로 쏜살 같이 도망쳤다. 왜 그랬을까! 선생님께서는 “그 노루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 속으로 뛰어든 것”이라 하였다. “노루를 뒤쫓은 맹수는 호랑이니 지금부터 개인 행동을 말라.”는 주의를 주셨다.
<나의 가족과 청량사 답사>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가족들과 함께 청량사에 가는 날이다. 팔만대장경 축제장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소리길을 따라 걸었다. 중간에 몇 번을 쉬면서 가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녀가 할 말을 하였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절을 지었을까!” 상당히 힘이 드는 모양이다. 지금은 많이 번창한 청량사의 모습을 보면서 준비한 간식을 먹었다. 그리고 옛날 할아버지가 소풍와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축대 끝을 조심스레 살피는 손주들이 대견하다. 그들도 다음에 이곳에 오면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기억할까!
소인은 이 글을 쓰기 위하여 몇 번 이곳을 찾아, 고운 선생이 홍류동 농산정(籠山亭)에서 이 곳으로 즐겨 다니던 길을 탐색하면서 ‘소리길’과 만나는 지점에서 ‘고운길로 복원하였으면’ 하는 바램을 피력한 적이 있다. 다음은 ‘지관 대종사님의 해인사지’에서 인용한다.
<고운 선생과 청량사> 청량사는 해인사 큰 절에서 약 10Km 지점인 매화산(남산 또는 월류봉) 남쪽 청량리 뒷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구원리 도자기 공장에서 개울을 건너 서쪽으로 약 2Km쯤 청량리 쪽으로 올라간다. 신라말 최치원( 857~?)선생이 체류(滯留)하였던 곳이라고 하니, 동국여지승람 권30 합천군 청량사 제하에 청량사 “재월류봉하 최치원 상류우차(在月留峰下 崔致遠 嘗遊于此)”라 한 기록을 보더라도 충분히 입증된다.
사내의 삼국통일기의 작품인 석조석가여래좌상(石造釋迦如來坐像), 삼층석탑, 석등 등 보물로 미루어 보아 삼국통일 전후에 이미 창건되어, 치원이 가야산에 들어올 때 까지에는 절이 보존되고 있었으나, 그 후 한동안 폐사(廢寺)되었다가, 1811년부터 중창(重創)되었다. 대웅전에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대형 버스도 올 수 있는 길이 최근에 완공되었다. 이 절은 길상암 길상봉에서 이어지는 석화상이 천불탑이 되어 남산 제1봉으로 이어져 있어 ‘제2의 금강산’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