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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지하철에서 집으로 가는 길 – 정병수 재경합천향우회 부회장

몇 년 전 이사할 때 하도 힘이 들어 다시는 이사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건만, 팔자에게 이사하는 운이라도 숨어 있는지 2018년이 되자마자 또 용인 수지로 이사를 왔다. 이사하는 날 이삿짐센터와 의사소통이 잘못 되어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입주 아파트엔 자정이 넘어서야 정리는 고사하고 짐만 부릴 수 있었다. 그 시간까지 고가 사다리차를 작동시켜 심야 소음을 유발하였으니 주민들로부터 받을 원성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 다음 날부터 승강기에서 입주자를 만나기라도 하면 나는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902호에 새로 이사 온 사람입니다.”, “아,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어젯밤, 늦게까지 고가 사다리차 소음으로 많이 시끄러웠지요? 죄송합니다.”, “원, 별말씀을요. 제가 이사할 때도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이삿짐 정리하려면 고생 좀 하겠습니다. 자 그럼 먼저 내립니다. 수고하세요.”, “고맙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이사 온 지 두 달이 지났는데 아직 민원이 없어 한편으로 다행이고, 또 한편으론 소음을 참아 준 우리 동(棟)의 아파트 분들께 고마울 뿐이다. 그러나 이사 온 지역은 처음부터 도시계획으로 설계된 지역이 아니고, 건설회사 형편대로 조성된 것인지는 몰라도 강남의 반듯한 도로와는 달리 대부분 도로가 곡선인데다 오르락내리락 비탈진 길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여보, 우리가 혹시 너무 급하게 판단하여 잘못 이사 온 것 아니야?”, “왜?”, “도로도 그렇고, 지하철역까지는 5분 걸린다고 했는데, 아직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 참 지하철역이 어디지? 그건 그렇고 5분이라고 한 것은 걸어서가 아니고, 자동차로 5분 걸린다는 뜻이지.”, “그건 무슨 소리야? 자동차로 5분이라니? 난 걸어서 5분인 줄 알았는데……..허 참! 서울 갔다가 오려면 큰일 났네!”, “왜 큰일 난다고 그래? 좀 걸으면 운동도 되고 좋지 뭐.”
맞는 말이다. 드디어 목요일 아침, 나는 문학강좌 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신분당선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과정에서 환경에 익숙하지 못한 탓인지 나는 헤매다 그만 지각하고 말았다. 그 날 오후 옛집에 가 우편물도 챙기고 친구도 만나다 보니 어느새 6시가 되었다. 바람도 세고, 간간이 눈발도 내려 스산하였다. 나는 수지로 이사한 사실을 잊고 옛 아파트로 가는 노선버스를 기다리다 타기 직전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부랴부랴 신분당선 플래트홈으로 내려가니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뿐하게 다가오는 전동차 안은 이미 좌석은 물론이고 입석 승객으로 차있는데다, 다시 일단의 우리 무리가 승차하니 객차 안은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런 복잡한 객차 안인데도 불구하고 좌석에 앉은 사람은 물론이고 선 사람들도 거의 예외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20여분 지났을까 빈 좌석이 하나 둘 보이더니만 내가 내릴 상현역에 다다르니 앉은 승객보다 빈자리가 더 많다. 개찰구 앞의 넓은 홀은 광장처럼 시원하고 대낮같이 밝다. 50미터나 될 듯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오니 빌딩 숲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찬바람에 얼굴이 시리다. 직진 30여 미터를 더 가면 왕복 6차선 도로에 횡단보도가 있다. 건너는 사람이 많지 않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상현중학교가 나타나고 그 앞쪽으로 개울(川)이 흐른다. 겨울인데도 얼었던 이 녹아서인지 물이 제법 흐른다. 개울이라야 폭이 5~10미터 정도인데, 개울 양쪽에는 폭 1 미터 정도의 산책길이 잘 포장되어 있다. 훤히 비추는 가로등 때문에 밤길을 혼자 걸어도 무섭지 않다. 지금은 겨울 중에서도 한겨울이라 걷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따뜻한 봄이 되면 아름다운 꽃길로 변할 것이다. 산책길 주위에는 아파트나 상가도 거의 없고, 보이는 것이라곤 개울과 또 개울과 나란히 서 있는 초등학교, 중학교 및 고등학교 건물의 상층부와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한데 어울려 어릴 때 동화 속으로 인도한다.
개울의 바닥에는 가을 갈대가 빛이 바랜 채 그러나 꼿꼿하게 서 있고, 갈대숲 속으로는 최근 내린 눈 때문인지 물소리가 졸졸 노래한다. 군데군데 얼음이 얼어 있어 옛날 고향에서 썰매 타던 생각이 나고, 개울 양쪽으론 버들강아지를 비롯한 갖가지 나무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봄에는 뱀 출현이 많은지, 군데군데 뱀을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채 1킬로미터가 안 되는 도심속의 시골 길을 걷다 보면 또 다른 쪽에서도 개울이 흘러 두 물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나타난다.
아쉬운 것은 그 두물머리 지점에 조그마한 보(洑)라도 설치하면 물이 고이고 물고기도 놀아 그 위로 놓인 목조 다라와 함께 운치 있는 한 폭의 그림이 되리라.
그 나무다리를 건너면 ‘정암 수목공원’ 산자락이 나타난다. 정암은 중종 때 신진 개혁정치가인 조광조의 호이다. 그 산자락을 걸을 때 넘어지지 말라고 깐 야자 메트를 사뿐사뿐 밟는 느낌도 좋고 간간히 들리는 새소리도 좋다. 5분쯤 등산하듯 걸으면 아파트가 나타난다. 전철역을 나설 때 간간이 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다음 날 아침, 유리창이 훤하여 창문을 열다가 나도 몰래 감탄사를 던졌다. 9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은 밤새 내린 눈이 아파트 앞 야트막한 공원을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든 것이다. 신선이 살 법한 선경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정암 수목공원’을 오르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정상에서 공원을 내려와 낯선 길로 접어들자 예상하지 못한 호수가 나타난다. ‘신대 호수’란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전원주택에 살아보겠다고 반년 남짓 헤매다 최종적으로 살고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포기하였다. 그 포기의 보상으로 이곳 반촌반도(半村半都)의 아파트를 선물 받은 것인가? 결과적으로 나는 전원주택 대신 전원아파트로 대체한 셈이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눈도 자주 내리고 날씨도 추웠다. 겨울이 춥기에 따뜻한 봄의 소중함을 더 깊게 느끼게 할 모양이다. 나는 오늘도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올 때면 마을버스 대신 사람이 뜸한 조용한 산책길을 따라 걷는다. 아마 이 길을 좋아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어릴 때 고향 길을 걷던 길과 비슷해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개울과 숲을 통하여 빨리 따뜻한 봄이 왔으면 하는 나의 염원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으며 생각에 잠긴다. 봄이면 버들강아지 꺾어 피리불고, 진달래를 많이 따 먹어 입술이 새까맣게 된 것도 모르고 놀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나도 모르게 어릴 때 불렀던 “고향의 봄’이 흥얼거려진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 고향 /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