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오피니언)칼럼

만수동 역사루트를 찾아 10회 – 우륵(于勒)과 오동(梧桐)나무

하재효
논설위원

우륵, 왕산악, 박연 선생은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리고 있다.
우륵은 대가야시대 말기 사람으로 가실왕의 명을 받아 12현금인 가야금을 만들어 연주한 악성이다, 우륵이 살았다는 <정정골>은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의 <금곡>을 말하는데 가야금의 연주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므로 그 여운을 따라 이 마을 이름을 지금도 <정정골>이라 부른다. 가야금은 오동나무로 바탕을 만들고 명주실로 12현을 만들어 오른 손으로 음을 뜯고 왼손으로 기러기발 바깥쪽을 동요시켜 소리의 고저를 조정하는 악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금은 그 위가 둥그니 이는 하늘을 본뜨고, 아래가 평평하니 이는 땅을 본뜬 것이며 또 현주가 12개이니 일년 열두달을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가 비었으니 이는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상징하고 주고가 3치이니 이는 천·지·인(天地人)을 본뜨고, 쟁의 길이가 6자이니 이는 율수를 본딴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가실왕은 우륵에게 작곡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우륵은 가야연맹 각 지방을 소재로 12곡을 작곡하였는데 가야연맹의 산천과 풍물,그리고 인심을 두루 살피어 가야 사람들의 티없이 맑은 정서를 담아 심금을 울리는 곡을 작곡하였다.
대가야가 서기 562년에 신라에게 패망하자 우륵은 신라에 투항하였다.(우륵이 포로 당했다는 설도 있음). 신라의 진흥왕이 우륵을 국원(國原:지금의 충주)에 살도록 하여 (또는 대가야의 청주 천도설도 있음) 가야금과 가무를 신라인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신라 진흥왕 12년 3월에 왕이 순행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니 우륵과 그 제자 니문(尼文)이 음악을 잘 한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러 하림궁(河臨宮)에서 가야금을 타게 하였더니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곡을 지어서 신비로운 연주를 하여 진흥왕이 크게 칭찬하였다. 우륵은 말년을 탄금대(지금의 충주)에서 보냈는데 달천을 건너서 마주 보이는 곳에 가야에서 포로로 잡혀온 가야인들이 모여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 들어며 우륵과 함께 망국의 한을 달래며 울었다는 청금정(聽琴亭)이 지금의 청주시 칠금동 390번지에 있다. 우륵은 평생 185곡을 만든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 있으나 지금까지 전하는 곡은 없고 정정골에서 12곡을 만든 곡명만이 기록에 남아있다. 우륵이 가야금을 만드는데 쓰인 오동나무를 채취하기 위하여 즐겨 찾았다는 역사루트를 찾아가기로 한다.
<오동나무 채취골을 찾아>
만수동(야로~가야면 일원)의 야로면 정대리 3구에는 보태동(甫台洞:보탑),신정동(新汀洞:신정대),조양동(朝陽洞:조래이)의 3개 자연부락이 있으며 그 중 조양동이 곧 우륵의 오동나무 채취마을이다. 야로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600m 국도를 따라가면 고속국도 야로대교(오작교)가 나온댜.다리밑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신정동이 나오는데 이 부락을 지나 300여미터 내려가면 바둑판처럼 정리가 잘 되고 평화로운 전원 마을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곧 오동나무 마을(조양동)이다. 아침에 일찍 해가 뜨고 앞에는 맑은 물이 감아 흐르고 뒤에는 아름다운 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결이 곱고 단단한 오동나무가 자랐을 뿐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과 천렵(川獵)을 즐기면서 이 정서와 감정을 담아 12곡을 작곡하고 가야금을 뜯었으리라 미루어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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