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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국 가야 (2) – 차세운 경북대학교 행정학 석사

가야사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전기 가야연맹시기, 광개토대왕의 금관가야 침공,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후기 가야연맹시기로 이해하면 편하다.
전기 가야연맹은 금관가야를 맹주로 하여 김해 등지의 낙동강 서부를 중심으로 번성하였고 시조는 구지가의 주인공인 김수로다. 철기가 발달한 변한에서 파생한 가야 역시 철기가 발달해 ‘철의 왕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또한 토기 분화가 우수하여 철과 토기를 매개로 중계무역이 발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야의 토기는 신라, 백제의 토기와 확연히 구분된다. 일본의 스에키 토기는 가야토기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시험에서 스에키 토기가 나오면 가야와 연관지어 풀면 된다.
가야는 다른 주류국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역사를 직접 기록으로 전하지 못한 비운의 국가다. 가야사 연구의 소재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 문헌자료가 빈약하며, 가야 고분군들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을 통해 그 실체를 더듬어나가고 있다. 경기가 악화되면서 발굴사업도 줄어들게 되고 방치된 고분군들이 많아서 관심이 필요한 실정이다. 일본은 이러한 역사연구의 공백을 파고들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였는데, 그 내용은 기원 후 4C∼6C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의 김해 혹은 함안에 일본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임나(任那)는 가야를 일컫는 말이다.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이용해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는 정한론(征韓論)의 근거로 사용하였다. 물론 학자들의 노력으로 대부분 거짓임이 밝혀졌지만 그동안 가야사는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결속을 다졌고 중앙집권국가로 도약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가야는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였다고 보여진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정벌은 가야사의 한 분기점이 된다. 신라에 왜구가 들끓자 내물왕은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고구려는 5만의 병력을 신라에 파병하였는데 이때 전기가야연맹은 침체하게 되고 이후 신라 법흥왕에 의해 멸망당한다. 한편, 경북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는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고 후기 가야연맹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대가야는 이진아시왕을 시조로 하는데,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뇌질주일과 뇌질청예를 낳았고 뇌질주일이 대가야의 시조가 되었고, 뇌질청예가 금관가야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최치원, 석이정전)
신라가 고구려와 손을 잡게 되면서 가야연맹의 입지는 더욱 위태롭게 된다. 그런데 대가야의 전성기를 이끈 하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가야는 섬진강 일대로 눈을 돌려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다. 그 증거로 섬진강 유역에서 가야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하지는 신라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중국 남제(南齊)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가야연맹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 (남제서, 만동남이전)
그러나 고구려에 밀려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던 백제는 가야가 호남지역으로 확장해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백제의 도읍이 한성(서울)에 있을 때는 가야세력의 팽창을 어느정도 묵인하였는데, 가야가 신라로부터의 방파제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세가 바뀌면서 백제의 외교적 입장도 달라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대가야는 신라와 동맹을 통해 백제와의 불편해진 관계를 타파하고 힘의 균형을 이루려고 했다. 522년 대가야의 이뇌왕은 신라에 청혼하였고 법흥왕은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내 결혼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결혼동맹을 통한 대가야의 외교전략은 처음부터 동상이몽이었다. 신라의 계산은 점진적으로 대가야를 합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간파한 대가야는 왜와 다시 손을 잡으려 했으나 판세는 이미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사실 가야연맹 초창기부터 신라와 백제의 압박, 그리고 ‘따로 또 같이’로 표현할 수 있는 6가야의 분립성은 가야연맹의 아킬레스건이었다. 561년 신라의 진흥왕은 이사부를 보내 대가야를 멸망시켰고, 이로써 700년 가야사는 마침표를 찍게 된다. (김부식, 삼국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