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을 들녘에서 – 송영화 한국문인협회 합천지부장
만추의 노을은 비계산에 걸려 있고 매화산 단풍은 가슴 설레게 아름답지만 가을걷이를 끝낸 농업인의 얼굴로 빈 들녘처럼 스산한 바람이 지나간다. 지난 여름 유별나게 더웠던 탓인지 벼 수확량과 품질 또한 기대치를 못 미치는데 그나마 높게 형성 될 것 같은 예상 가격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사십대에 친환경농업과 농업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모든 산업의 가치는 오직 농업의 가치보장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과 농업의 유지존속과 성장 없이는 인류의 미래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이십년이 지난 지금, 자꾸만 지키기 힘든 구호로 전락하는 것 같아 이 가을이 더욱 시리기만 하다.
유년시절 가을은 메뚜기가 뛰고 하얀 무명 수건을 쓰신 어머니가 깻단을 묶으며 흥얼거리시던 노래로 기억된다. 한 짐 깻단을 짊어지고 지게 작대기 힘을 빌려 영차 일어서곤 하시던 아버지 무릎에서 나던 삐그덕 소리…….
그 때는 몰랐다. 어머니의 노래가 한으로 가득하고 아버지 무릎의 삐거덕 소리가 육남매를 키워내려 골병 든 소리였다는 것을…… 다른 것은 다 해도 좋으니 농사만은 짓지 말라며 손사래 치던 아버지 말씀의 의미를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봄이면 민둥산에 붉은 천지를 이룬 참꽃을 따 먹어 푸르딩딩해진 입술을 서로 쳐다보며 까르르 웃었고 여름이면 땡볕에 그을려 새카매진 얼굴로 온종일 피라미를 쫓아 다녔다. 가을바람이 분다 싶으면 곧 추수가 닥쳤고, 늦은 밤까지 졸면서 탈곡기를 밟다 오줌이 마렵다는 핑계로 빠져나와선 짚더미 속에 숨어들곤 했었다. 이윽고 겨울이 오면 등불을 들고 초가집에 깃든 참새를 잡는 것으로 지지배배 웃음이 끊이지 않던 내 살던 산골마을 숭산.
놓쳐버린 버스처럼 시간이 흘러 어느덧 반백머리 친구를 보면서 나도 이제 나이를 느끼곤 한다. 삶은 완성이 아니라 하나 씩 이뤄 가는 것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텅 빈 들녘, 마른 논두렁에 퍼질러 앉으니 살아온 날과 달리 세상 모두가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래 그런 거야. 세상사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았던가? 열정과 패기 가득하던 젊음을 농사에 바치고 미친 척 살아오는 동안, 타협도 돌아 볼 줄도 몰랐던 어리석음을 자책하면서 멀리 보이는 가을들녘이 새삼 곱다.
아프지 않은 삶이, 서럽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만, 고단한 농업인들에게는 꽃도 짐이 되는 현실이기에 조금만 물가가 들썩거려도 만만한 농산물 가격 탓하기를 서슴지 않는 도시민들에게 묻고 싶다.
한 끼에 삼백 원에도 안되는 쌀값이 비싸다며 독설을 쏟아내는 당신들 손에 들린 스타벅스 커피는 얼마며 온통 수입 농산물과 GMO 원료로 범벅이 된 패스트푸드 가격은 또 얼마냐고?
하기야 만져지는 이익만이 평가받는 극한 수익성 추구의 사회풍토 속에서 입증조차 어려운 농업의 직접가치와 다원적 기능의 가치를 말해 봐야 내 속만 상할 일이다. 농사 좋아하는 우리라도 엄치 척 서로 치켜 주며 그렇게 햇솜 같은 마음으로 보듬어가며 살아야지.
내년 가을은 오늘보다 더 나은 농업환경이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직업 농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