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純情) – 이호석 논설위원
얼마 전, 어떤 단체에서 주관한 1박 2일 간의 연수회에 다녀왔다. 이 연수회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순정’이란 단어를 정말 모처럼 떠올린 적이 있다. 연수회는 한국의 ‘나폴리’라는 통영의 바닷가 제법 큰 리조트에서 있었다. 잘 꾸며진 별관의 큰 강당에서 감명 깊은 강의를 들었고, 오랜만에 경남 도내 곳곳에서 온 지인들을 만나 반가웠다.
이번 연수에는 150여 명이 참석했다. 주로 60대 후반부터 70대이지만, 가끔 80대 초반의 노인도 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우리 군에서 함께 간 네 사람과 인근 군에서 참석한 네 사람이 같이 앉았다. 모두 고향 사람들처럼 편안하다. 같은 테이블에는 70대 중반의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할머니는 얼굴도 곱상하게 생겼고, 지성미가 풍기는 좋은 인상이다. 처녀 시절에는 제법 이웃 청년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것 같다. 지금도 언행에 품위가 있고 상대를 편안하게 하여 누구나 호감이 가게 한다.
첫날 첫 강의 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좀 먼 테이블에 앉아 있던 훤칠하게 잘생긴 할아버지 한 분이 그 할머니를 찾아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할머니는 얼핏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시절 같은 학교 동창이라며 이름을 밝히자 그제야 할머니가 기억을 더듬으며 아는 체한다.
초등학교 졸업 후 각자 다른 지역에서 까맣게 잊고 살다가 70대 중반의 나이에 만났으니 몰라볼 만도 하다. 할머니가 옆 좌석 사람들에게 초등학교 동창이라며 인사를 시켰고, 동병상련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 금방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눈다. 첫눈에도 그 시절에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무척 좋아했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시절의 얘기를 꺼낸다. 할머니는 어느 공무원 집 딸로 옷도 예쁘게 입고 다녔고 얼굴도 예뻐 항상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단다. 자기도 무척 좋아하는 마음이었지만 가까이에 가지도 못하고 멀리서 혼자 좋아했단다. 자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짝사랑이란 걸 알게 한 사람이라며 웃었다. 할머니는 솔직히 할아버지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두 사람은 금방 그 시절로 돌아가 어린애들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얘기를 나눈다.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시절 멀리서만 좋아했던 그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1박 2일 연수 기간 내 할머니를 찾으며 친하게 지낸다. 꾸밈도 허물도 없는 그 모습이 정말 순수하고 보기 좋았다.
나는 이러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면서 혼자 씽긋이 웃었다. 할아버지가 한 노년의 고백이 어쩌면 60여 년 전 내 마음과 똑 같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내가 사는 마을은 읍 소재지에서 오리길 정도 떨어져 있는 농촌 마을이다. 당시 마을의 집들은 모두 초가였고, 마을 앞 도로는 비포장 자갈길로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면 뽀얀 먼지가 온 마을을 덮었다. 또 농토가 적은 우리 마을은 대다수가 어렵게 살았고. 우리 집 역시 3대 열 식구가 얼마 되지 않는 토지로 힘들게 살았다.
여덟 살 되던 해 봄,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나왔다. 입학식 날, 결혼 적령기에 있던 작은 고모님의 손에 이끌려 자갈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관할 초등학교로 갔다. 오리길 남짓한 길이 왜 그렇게 멀어 보여든 지, 처음 본 학교 시설은 모두 웅장하고 신기했고, 생전 처음 만난 친구들은 호기심과 반가움과 두려움으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고모님을 따라 며칠을 다니다가 그 뒤부터는 4학년에 다니는 누나를 따라다녔다.
읍 소재지에 사는 친구들은 언제나 중심에서 한통을 치며 활발하게 뛰놀았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외촌 친구들과 나는 한동안 멀찍이서 겉돌기만 하였다. 예쁘게 차려입은 읍내 부잣집 딸들은 마치 인형처럼 예뻤다. 나는 틈틈이 소를 먹이고 소꼴도 베야 하는 촌놈이라 감히 그런 여학생들과 말조차 섞기 어려워 항상 멀리서만 바라보며 좋아했다. 내 성격이 내성적인 것은 그때의 영향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연수회에서 만났던 그 할아버지와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여학생을 좋아했던 그 마음을 지금의 성인 남녀들의 사랑과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았다. 그야말로 아무런 조건이나 욕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했으니 ‘순정’이란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7,80연대까지만 해도 책이나 영화 등에서 ‘순정’이란 말을 만이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갑돌이와 갑순이’란 노랫말을 가끔 떠 올려보곤 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처녀, 총각이 서로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서 아쉬워하는 그런 마음을 그린 것이다. 그 때만 해도 농촌에서는 같은 마을의 처녀, 총각이 결혼하는 것을 별로 탐탁찮게 여길 때라, 전국에서 그 노랫말 같은 사연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갑돌이와 갑순이의 사랑도, 오늘날 남녀 간의 사랑, 특히 미모 제일주의에다 가문, 가족, 재력, 직장 수입 등 온갖 조건을 따지면 만나는 그런 사랑과는 비교되지 않는 ‘순정’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순정’이란 말은 언제 들어도 정겹고 마음 설레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각박한 것은 ‘순정’이란 말이 오염된 세파에 밀려 멀리 가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