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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달밤을 거닐면서… – 이호석 논설위원

저녁 식사 후, 잠깐 TV를 본다. 오늘도 우울하고 스트레스받는 뉴스들뿐이다. 무거운 마음을 잠시 거실에 내려놓고 마을 주변을 걷는 저녁 운동을 하려 나섰다. 조금 전 떠오른 밝은 달이 마치 수정덩이처럼 아름답다. 온 마을이 대낮같이 밝지만 뛰어놀 청소년들이 없는 골목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은은한 달빛과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이 조화를 이루며 마을을 무대로 비추는 조명 같다. 나는 골목길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어 서서히 걷는다. 조금은 싸늘한 공기와 조화롭게 비추는 조명이 거실의 TV 속과는 전혀 다른 상쾌함을 준다. 농촌인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50여 년 전이다. 수년 전부터 마을 안길과 주변 도로 곳곳에 가로등도 설치되었다. 그동안 맨날 집안에서나 가로등 전깃불만 쳐다보느라 저렇게 아름다운 달을 까맣게 잊고 있었나보다. 별로 넓지 않은 외곽도로를 따라 걷는다.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이 나를 아는 체하며 반긴다. 오늘같이 밝은 달밤에는 잠시 불을 끄고 쉬어도 될법한데, 오히려 밝은 달빛을 시샘이라도 하듯 자신들의 온 힘을 다해 길을 밝히고 서 있다. ‘네놈들이 아무리 애써 밝혀봐야 어찌 온 천지를 환하게 밝히는 달빛에 비할 수가 있겠나.’ 간사한 마음은 칠흑 같은 밤길을 밝혀주는 고마움도 잠시 잊은 채, 혼자 비아냥거린다.
달은 해처럼 찬란하지도 않으면서 암흑의 밤을 적당하게 밝혀준다. 해는 눈부시게 밝은 빛과 따스함을 주면서 모든 식물을 성장케 하고, 달은 저녁이면 잠깐 쉬는 식물들을 은은한 빛과 포근함으로 어루만져 준다. 달은 초승달과 보름달, 그리고 그믐달로 변신하면서 인간에게 주는 감정도 다 다르다. 초승달은 기다림과 희망을 주고, 보름달은 밝음과 즐거움을, 그믐달은 쓸쓸함을 준다.
필자는 어릴 적 달을 보면서 방아 찧는 토끼와 계수나무와 함께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고, 예쁜 소녀를 만나는 행복한 꿈도 꾸었으며, 뚜렷이 목표도 없는 먼 장래의 꿈을 맘껏 그려보며 소원을 빌기도 하였다. 평소 사람들은 달을 보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지만, 사업 실패나 실연 등으로 실의에 빠졌을 때는 죄 없는 달을 보고 하소연도 하고 원망도 한다. 또 생활이 어려운 옛날에는 많은 새댁들이 고된 시집살이가 힘들어 저녁이면 식구들 몰래 휘영청 밝은 달을 쳐다보며 친정의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지웠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다문화 가정의 많은 여인네들이 낯설고 물선 이곳에서 그렇게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소원과 아픔을 다 들어주는 신앙의 대상이자 속 깊은 좋은 친구이다.
필자는 ‘달’하면 먼저 예부터 전래 오는 ‘강강술래’가 떠오른다. 강강술래는 전라도 해안지방의 고유 민속무용이라고 하지만 아름다움보다도 처연함을 느끼게 한다. 옛 부녀자들의 고된 삶과 한을 잠시나마 달래주기 위해 탄생한 민속놀이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달을 소재로 하여 어린이들에게 꿈과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는 동화나 동요도 많고, “신라의 달밤‘이나 ‘전선 야곡’, ‘달 타령’ 등 어른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즐겁게 하는 노래도 수없이 많다. 이렇게 달은 우리 민족과는 유난히도 밀접하고 친근하다.
작은 개미의 행렬도 볼 수 있는 밝은 대낮보다 감출 것은 감추어지면서 적당히 밝은 달밤에 알 듯 모를 듯 일어나는 일들도 얼마나 많은가. 밝은 달빛이 주변의 산과 들에 아름다운 조명으로 비치면서 어릴 적 추억들이 하나 둘 두서없이 떠오른다. 여름 달밤이면 마을 앞 황강으로 나가 백사장을 마음껏 뛰놀다 멱을 감기도 하였고, 가을 달밤에는 또래들이 모여 벼 타작을 하고 쌓아놓은 짚단 속에서 껄끄러운 줄도 모르고 뛰놀았으며, 돌담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도둑 잡기도 하고, 가끔은 남의 과수원을 습격하여 과일을 따다 먹기도 했다. 또 포근하고 은은한 가을 달빛은 농촌의 순진한 청춘 남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야외로 불러내어 남몰래 사랑을 나누게 하는 중매쟁이가 되기도 한다.
달에 얽힌 재미있는 옛날 얘기도 많다. 호랑이한테 쫓기는 착한아이에게 쇠동아줄을 내려준 이야기며, 물레방앗간에서 이루어진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 초등학교 교과서를 통해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던 ‘의좋은 형제’ 얘기도 모두 달밤이 무대였다.
달은 유구한 세월 동안 우리 민족과 희로애락을 함께 지내왔다. 꿈과 희망을 주기도 하고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주기도 한다. 마치 밝은 해는 자식들의 삶을 다잡고 재촉하는 아버지와 같고, 은은한 달은 따뜻한 사랑으로 항상 자식들의 고달픔을 보듬어주는 어머니와 같다.
찌든 현대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가끔씩 은은한 달빛아래 사색의 나래를 펴는 것도 마음의 평온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