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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조작 – 문계성 수필가

당신이 배우는 지식이나 접하는 정보가, 누군가가 당신의 생각을 조종하여 당신의 신념을 지배하기 위하여 조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본적이 없는가?
요즘은 대통령이 나서서, 열심히 역사 재해석하기를 하고 있다. 역사 비틀기라고 하기 보다는 이 말이 아름다울 것이다. 대통령은,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이 이미 건국일로 정해진 마당에, 1919. 4. 13. 상해 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보아야 하다는 이의를 제기하여 논쟁에 불을 지폈다. 1919. 4. 13. 건국일 주장은, 1948. 8. 15. 수립된 남한 단독정부가 만든 국가의 국가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어 문제가 야기된다.
군과 경찰이 제주 4. 3 사건에 관하여 고개 숙여 사과했다. 대통령이 ‘이제야 봄볕이… “ 운운하며 한껏 반겼다. 제주 4.3 사건을 남로당의 무장 폭동에 대한 정부의 어쩔 없는 대응으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군경의 양민학살 사건으로 인식하여 국가적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에 관하여 국가가 죄의식을 느껴야 한다는 인식에는 오류가 없을까?
1917년 볼세비키 혁명에 성공한 소련은 세계 공산주의 종주국이 되었다. 레닌이 만든 코민테른은 1국, 1 공산당 원칙을 정하였고, 당시 나라가 없던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나 중국, 혹은 일본 공산당에 연류 되어 사상 교육을 받거나 연결고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 북쪽지방 사람들은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과, 남쪽 지방 사람들은 일본 공산당과 연류가 많았을 것이다. 제주도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일본과 매우 가깝고, 당시 일본과 제주도를 왕래하는 연락선이 있어 제주도에는 일본 공산당과 연루된 공산주의자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다는 말이 있었다. 식민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은, 민중해방과 토지 무상 분배를 부르짖는 공산당에 대하여 많은 호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2차 대전 승전국인 된 미국과 소련은 해방군으로서 각 남쪽과 북쪽을 점령하였다. 스탈린은 북쪽을 점령한 후 1946. 2. 점령지에 인민위원회를 만들었다. 인민위원회는 북한의 사실상 통치기구였다. 유엔은 1947. 11. 14.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가 수립되면 점령군은 모두 철수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북쪽의 반대로 유엔은 1948. 5. 10 남한 단독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집단은, 한국 전부를 공산위성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소련과, 남한에 공산정권을 세우고자 했던 남로당이었을 것이다. 제주도 남로당은 1948. 5. 10 남한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무장 투쟁의 유격대 대장이 일본군 소위 출신인 김달삼이었다. 이들은 1948. 4. 3. 새벽, 무장을 하고 제주도의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을 공격하여 사상자를 냈다. 이들은 한라산 산간으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감행했고, 이 사건으로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 10 총선을 치루지 못했다. 1948. 5. 10 선거로 성립된 이승만 정부는 1948. 10 부터 군경을 동원하여 이 무장 폭동을 진압했다. 이 전쟁은 1954. 9 경에서야 끝이 났다. 대부분의 무장유격대원들은 제주도에 부모와 형제가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가족에게 숨어들어 양식을 구하고 보호를 요청하며 투쟁을 계속했을 것이다. 경찰의 소개령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이들을 숨겨야 했을 것이고, 경찰은 이들을 색출해야 했을 것이다. 밤에는 유격대가 마을에 내려와 그들의 투쟁에 협력하기를 요구했을 것이고, 낮에는 경찰이 유격대 색출에 협조하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 1,700여명의 군경이 사망하고 10,000여 명의 제주사람들이 진압군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이 10,000여 명의 희생자 중에는 무장 투쟁을 한 남로당원들과 그들 가족도 있었을 것이다. 희생된 양민들이란, 대개 생사를 함께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던 무장 폭동 남로당원들의 가족이나 인척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와 관계없이 폭동군과 진압군에 희생된 순수 양민도 있었을 것이다. 6 년이나 계속된 전쟁이었으니 말이다. 이 무장 폭동을 이끈 유격대장 김달삼은 북으로 탈출하여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그는 이 4.3 사건을 ‘무장 구국 항쟁’이라 자랑했다. 그러나 남한노동당과 대척하던 북한노동당의 김일성은 이 폭동을 ‘위험한 모험주의’라고 비난했다. 이것이 대강의 4. 3 사건이다.
이 사건을, 남한에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총선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무장 폭동군과, 이를 진압하는 정부군 간의 전쟁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진압군이 제주 양민을 학살한 사건으로 보아야 할까. 양민학살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면 국가가 구태여 사과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북한에 대하여 상당히 열린 자세를 가졌던 김대중 정권에서도 남노당의 무장폭동 사건으로 조사를 마쳤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가족 관계를 차마 배반할 수 없었던 희생자들의 슬픔에 대하여, 혹은 무고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과 같은 슬픔을 느낀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이 공산주의자라 하여 버릴 수 있겠는가? 무장 폭동자라 하여 버릴 수 있겠는가? 얼마나 큰 슬픔이 그들 가족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을까! 이데올로기는 생각에 따라 바뀌는 것이지만, 천륜인 가족관계는 바뀔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형제를 침략하여 살육한 것이 6.25 전쟁이다. 우리는 이 전쟁을 얼마나 증오해 왔는가!
개인적 사과라면, 그것은 상황을 인식하는 개인의 철학이나 가치에 관한 일이므로 탓할 것이 없다. 그러나 국가의 일은,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며, 국가가 관리해야하는 상황대처와 관련된 일이다. 지금에 와서 국가가 4. 3 사건을 사과한다는 말은, 당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군경이 경찰을 습격한 무장 폭동을 진압한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말이 된다. 과연 이 논리가 옳은가?
사실은, 이 사건이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나라 안에서 일어난 좌파의 무장 폭동이었다는 것이다, 즉 좌파와 우파의 전쟁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이념대립을 하고 있다. 4.3 사건을 양민학살로 본다면 이념 논쟁의 새로운 불씨가 될 수 있다. 국력을 하나로 모아서 세계의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할 절명의 시기에, 구태여 이념이 대립하여 국력을 소모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역사는 해석에 따라 달라지며, 달라지는 해석에 따라 사람의 기억도 조작된다. 죽은 실패의 역사를 관에서 집어내어 시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