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읽는 동화| 산앵두가 익으면 – 소민호 동화작가
마을 앞 산자락에 하얀 산앵두꽃이 피었다.
진수는 키 작은 나무들 사이에 핀 산앵두꽃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또 오겠지?” 촉촉하게 젖은 진수의 눈에 그리움이 추억으로 아른거렸다.
햇살 맑은 봄이다.
혼자 사는 밤골 할머니 집에 한 소녀가 왔다. 할머니 손녀라고 했다. “그 애는 밤골 할머니와 함께 살 거래.”, “걔 엄마 아빠는……?”
마을 사람들은 소녀를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다음날 학교도 수런거렸다. 선생님 뒤를 따라 소녀가 들어섰다. 얼굴이 하얀 밤골 할머니 손녀였다. “오늘부터 함께 할 새 친구 ‘이 슬’이다.” 선생님이 소녀를 소개했다. 하얀 피부와는 달리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잔뜩 끼어 있었다. 전학 가는 친구 배웅은 가끔 했어도, 마중이 낯선 아이들에게는 슬이가 어색하고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슬이는 아이들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표정 없는 낯빛으로 제 자리를 지킬 뿐이다. 누가 다가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세상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지고 사는 어른들 만큼 무겁게 보였다. “쟤, 뭐야?”, “흥, 정말 기분 나쁜 애야!” 관심을 보이던 아이들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돌아섰다.
하교 시간이다. 진수는 슬이가 잘 따라 올 수 있게 천천히 걸었다. 아이들이 흩어지는 교문 앞에서는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면서 슬이 눈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슬이도 말없이 진수 뒤를 따라 걸었다. 진수는 지름길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이 안산이라고 부르는 산 허리길이다. 산길 고갯마루 키 작은 나무숲 속에는 진수가 아끼는 산앵두나무가 숨어있다. 자랑을 하고 싶은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며칠 뒤였다. 하교하던 아이들이 교문 앞에서 웅성거렸다. “너, 말할 줄 몰라?”, “꿀만 먹고 사는 애겠지. 왜, 꿀 먹은 벙어리라고 하잖아.” 짓궂은 남자 아이 몇몇이 교문을 나서면서 슬이를 집적거렸다.
“저리가!” 진수가 남자 아이들을 왈칵 밀어버렸다. “인마, 네가 뭔데 나서!” 남자 아이들이 진수에게 주먹을 날렸다. 진수의 입술에서 빨간 피가 흘렀다. “하지 마!”, “깜짝이야. 벙어리는 아니네!” 슬이 고함소리에 놀란 남자 아이들이 비척비척 가버렸다.
아이들이 사라진 뒤 슬이는 손수건을 꺼내 진수 입술을 닦아 주었다. 진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슬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제 됐어.” 슬이 목소리에 진수가 놀란 듯 눈을 번쩍 떴다. “씻어줄게.” 진수가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다. “아니야. 내가 씻으면 돼.” 슬이는 손수건을 가방에 넣고 앞장서서 걸었다. 타박타박 앞만 보고 걸었다.
“저게 무슨 꽃이야?” 앞서 걷던 슬이가 고갯마루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뭇가지들 사이로 배꼼이 내다보는 하얀 꽃을 가리켰다.
“어어, 저 저건, 산앵두꽃이야. 봄에 하얀 꽃이 피었다가 진 뒤, 여름에는 작고 빨간 열매가 열려. 참 맛있어!”
진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했다. “꼭, 벚꽃 같다. 꺾으면 안 되지?”, “괜찮아. 잠깐 기다려.” 진수는 숲으로 뛰어 들어가 산앵두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벌이다. 조심해!” 꽃에 앉았던 벌 한 마리를 보고 슬이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었다. “괜찮아. 이까짓 벌쯤이야…….” 진수도 벌은 싫다. 쏘이면 한참 동안 따끔거리고 아픈 벌이 반가울리 없다. 그래도 슬이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팔을 휘저으며 벌을 쫓았다.
“자, 받아.” 꽃을 받아든 슬이가 생긋 웃었다. 산앵두꽃을 꼭 닮은 웃음이었다. “왜, 하나만 꺾어?” 슬이는 아쉬운 눈빛으로 진수를 바라보았다. “다 꺾어버리면 열매가 안 열리잖아.” 슬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산앵두가 열리면 따달라고 했다.
그렇게 두 아이는 산앵두가 열리고 익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다녔다. “익었어.” 진수는 매미소리가 요란한 숲으로 슬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이게 산앵두야? 참 예쁘다!” 슬이는 금세라도 톡 터질 듯 반짝이는 빨간 산앵두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진수는 가지 하나를 꺾어서 슬이에게 내밀었다. 산앵두들이 춤을 추듯 대롱거렸다. “꺾지 마!”, “하나쯤은 괜찮아.” 진수는 싱긋 웃으며 잘 익은 것들만 골라 땄다.
“자, 가지고 가서 먹어.”, “너는 안 먹어?”, “나는 많이 먹었잖아. 올해는 네가 다 먹어.”진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슬이 가방과 주머니에 산앵두를 넣어주었다.
두 아이는 그렇게 오가면서 산앵두를 따먹고 산앵두 이야기를 했다. 가을에는 빨갛게 물든 산앵두 나뭇잎을 꽃이라 말하면서 다녔고, 겨울에는 산앵두나무 옆에 작은 눈사람 둘을 만들어 지키게 했다.
이듬해 6학년이 되면서 슬이를 바라보는 진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중학교도 여기서 다닐 거야?”, “여름방학 때 다시 전학할 것 같아. 아빠가 데리러 온다고 했거든.” 사슴 같은 슬이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진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찍 말했어도 네가 어떻게 할 수 없잖아!”, “……!” 슬이는 눈만 껌벅거리는 진수를 바라보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두 아이는 말수가 적어졌다.
“야호, 드디어 여름방학이다!” 아이들이 교실 문을 나서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진수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그래. 다 줘야지!” 앞서 걷던 진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음날부터 진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안산을 오르내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진수는 ‘그냥’이라는 말만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난 진수는 안산을 행해 달려갔다. 햇살과 매미소리를 머금은 산앵두가 진수의 마음처럼 빨갛게 잘 익었다. 진수는 옷 젖는 줄 모르고 산앵두 나뭇가지를 꺾었다. 맺혔던 이슬이 후두둑 떨어졌다.
큰 꽃다발만큼 꺾은 진수는 묶을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거면 되겠다!” 진수는 가느다란 칡넝쿨을 잡아 당겼다.
그 때였다. “왜애앵-!” 땅벌들이 날아올랐다. 칡넝쿨 뿌리쯤에 집을 짓고 살던 땅벌들이었다.
진수는 놀라서 후다닥 뛰었다. “앗, 따가워. 으아악!” 숲을 빠져나온 진수 몸엔 이미 땅벌 여러 마리가 붙어 있었다. 진수는 언덕을 굴렀다. 그래도 몸에 붙은 땅벌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벌이잖아!” 비명 소리에 놀라 달려온 마을 아저씨가 잎이 많은 나뭇가지로 벌을 털어냈다. “쯧쯧쯧, 얼굴이며 팔다리가 엉망이 됐구나!” 아저씨는 진수를 부축해서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구, 이것아, 아침부터……, 어, 이건 산앵두잖아!” 어머니가 진수의 등을 때리며 소리치다가 진수가 들고 있는 산앵두를 잡으려 했다.
“안돼요.” 진수는 산앵두 다발을 가슴으로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쯧쯧, 땅에 뒹굴면서도 이걸 놓지 않았어요.” 진수를 데리고 온 아저씨가 혀를 찼다.
그 때였다. 까만 승용차 한 대가 진수네 집 앞을 지나 마을을 빠져나갔다. “잠깐만!” 진수는 자동차를 따라 뛰었다. 손에 든 산앵두 다발도 함께 뛰었다. 하지만 자동차는 서둘러 산모롱이를 돌아 사라졌다. 달리던 진수는 그 자리에 섰다. 산앵두를 들고 있던 팔도 힘없이 늘어졌다. 우두커니 서 있는 진수 얼굴엔 벌에 쏘인 자국들이 산앵두처럼 빨갛게 부어올랐다.
진수는 그 때를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산앵두가 익으면 꼭 올 거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