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뉴스홈

|괴운잡기| 지평리(砥平里) 전적지 탐방 – 권해조 논설위원

며칠 전 경기도 양평에 있는 지평리(砥平里) 전적지를 답사했다. 지평리는 일제 강점기 의병활동의 효시지(嚆矢地)이자, 6.25전쟁 때는 고수방어(固守防禦)의 대표적인 전례를 남긴 전적지였다. 먼저 지평리에 있는 「지평의병(義兵). 지평리전투기념관」을 찾았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법정공휴일과 월요일은 휴관이었다. 기념관은 3층으로 세워졌으며, 1층 제1코너에는 의병활동, 제2코너에는 6.25 지평리 전투 상황실이었다. 2층 제3코너는 지평리 전투의 참상, 제4코너는 전쟁의 참혹사를 영상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었고, 3층 전망대에서는 당시 현지지형을 볼 수 있었다.
1층 입구에는 ‘1895년 희망의 횃불, 지평 의병 「외세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했던 희망의 승전보」’와 ‘1951년 역전의 발판, 지평리 전투 「전세를 뒤엎은 역전의 승전보」’란 글씨가 눈에 보였다. 제1코너의 지평의 의병활동실에는 의향(義鄕)의 양평, 일제침략과 저항의 역사, 항일 의병의 효시, 양평지역 의병활동 등의 내용이 전시되었다. 전시된 의병활동을 보면, 조선시대 이곳 출신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선생의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운동의 영향으로 그의 문하생들로 구성된 ‘화서학파’에서 항일투쟁, 상해임시정부, 광복군을 이끌었으며, 그 결과 순국자 103명과 독립유공자 230명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전기 의병활동은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와, 1월 단발령 공포 후에 지평출신 이춘영(李春永)과 김백선(金伯善)을 선봉장으로 400여명의 의병들이 국가위기를 인식하고 전국 최초로 의병을 창의했다. 의병활동 후기에는 권득수(權得洙) 김춘수(金春洙) 등으로 이어져 의병활동의 도화선이 되어 인근 강원, 충청지방까지 척사의병(斥邪義兵) 활동이 전개되었다.
제2코너의 지평리 전투실은 6.25 전쟁의 타임머신, 새로운 전쟁과 1.4후퇴, 전쟁의 전환점, 지평리 사수전투 등이 전시되었다. 지평리 전투는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에 맞선 유엔군의 첫 승전보였다. 이는 1951년 2월13일부터 16일까지 미 2사단 23연대와 미군에 배속된 프랑스군 1개 대대로 혼성된 UN군 병력 5,000여명이 지평리에서 중공군 3개 사단 규모 약 5만 명의 인해전술과 야간 집중공격을 막아낸 고수방어전투였다. 이 전투는 중공군 참전이후 유엔군의 계속적인 패배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안겨주어 그간의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평더하이(彭德懷: 1898-1974)가 이끄는 중공군은 전사 4,946명, 포로 79명이었고, 유엔군은 전사 52명, 부상259명, 실종 42명이었다. 특히 미 23 연대장 펄 프리먼(Paul L. Freeman:1907-1988)대령과 프랑스군 대대장 랄프 몽클라(Ralph Monclar: 1892-1964) 중령의 지휘력과 함께 미 5기병 연대장 마셜 G.크롬베즈 대령이 전차위주 특수임무 부대를 편성하여 악전고투 끝에 연결작전에 성공한 것이 전승의 원인이었다.
특히 프리먼 대령은 박격포탄에 다리를 부상당하고도 후송을 거부하고 연결작전을 끝날 때까지 부대를 지휘했으며, “나는 내 부하를 이끌고 여기에 왔다. 내가 반드시 이들을 데리고 갈 것이다”라며 강인하고 의연한 지휘관의 면모를 보였다. 몽클라 중령도 1.2차 세계대전에서 중장까지 진급하고도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하여 대대장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유엔군의 한사람으로서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니 놀라울 뿐이다.
다음은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 위치한 이항로선생 생가(경기도 유형문화재 105호)를 방문하였다. 이항로는 당시 주리론(主理論)과 이원론(二元論)을 주창했으며, 호남 기정진(奇正鎭), 그리고 영남 이진상(李震相)과 더불어 19세기 주리철학(主理哲學)의 3 대가의 한사람으로 한말 거유(巨儒) 김평묵(金平黙), 최익현(崔益鉉), 유인석(柳麟錫), 홍재학(洪在學)등이 그 문하생이다. 특히 이항로는 바른 것을 지키고, 잘못된 것을 배척한다는 ‘위정척사운동’의 주창자로 의병투쟁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지평리는 예부터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지리적 조건으로 뱃길과 육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로 중앙 소식이 비교적 빨리 전파되었다. 그리고 근처에 용문산이 있어 일제강점시대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 작전은 물론 의병모집과 주둔이 용이한 곳이었다. 필자는 의병의 효시지요, 6.25전쟁 때 유엔군의 공세전환의 전기가 된 지평리전투 전적지를 둘러보고 지평리전투의 역사적 재평가를 해보았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장병들과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이국(異國)땅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용감히 싸우다가 숨져간 영웅들에게 삼가 명복을 빌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