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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읽는 동화| 금이 간 항아리 – 소민호 동화작가

사금파리 무더기 옆에 찌그러진 항아리 하나가 나뒹굴었습니다. 온몸에 먼지도 뽀얗게 앉아 있습니다.
“우웅- 이러고 보니까, 내 꼴이 사금파리랑 다를 게 하나도 없구먼!” 항아리를 더 마음 아프게 하는 건 찌그러져 주름 잡힌 옆구리보다 금이 가고 구멍 난 밑바닥이었습니다. “쪽 쪼로롱, 무슨 항아리가 이래?” 박새 한 마리가 파드득 날아와 항아리 위에 앉았습니다. “너까지 왜 이래? 보기 싫으면 다른 데 가면 될 거 아니야!” 항아리는 화를 발칵 냈습니다.
“쪼롱 쪼롱, 몸이 그러면 성질머리라도 좋아야지, 그게 뭐냐?” 박새는 항아리 몸 위에서 콩콩 뛰며 조잘거렸습니다. 항아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을 잊었습니다.
“왜, 내가 그 말 했다고 삐친 거야? 알았어. 안 그럴게. 그런데 네 몸은 어쩌다가 번데기 사촌이 되었어?”, “야, 너 말 다 했어? 번데기 사촌이라니!” 듣다 못한 항아리가 바람을 잡고 몸을 흔들었습니다. “아이, 깜짝이야. 알았어. 안 그럴 테니까 말해 봐.”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못하는 박새였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리며 항아리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항아리 눈에는 그런 박새가 밉지만은 않았습니다. 항아리는 박새가 조르는 바람에 떠올리기도 싫은 그때 이야기를 살짝 풀어 놓았습니다. “가마에서 막 나와 내 몸을 보는 순간 힘이 쭉 빠졌어. 옆구리가 찌그러지고 입까지 비뚤어진 게 얼마나 흉측했는지 몰라. 거기다가 할아버지는 ‘에이, 이건 못 쓰겠구먼!’ 하면서 나를 사금파리 옆에 쿡 처박아 버리는 거 있지. 그때 내 밑바닥이 돌멩이에 부딪쳐서 구멍까지 뻥 뚫린 거야. 조각만 안 났을 뿐이지, 이게 어디 항아리라고 할 수 있니? 휴우- 사금파리 신세나 다름없는 거지!”, “그러면 구멍까지 난 거야?” 박새는 구멍 난 걸 몰랐던지, 항아리 안을 기웃거렸습니다. “속 시원하게 한 가지 더 말해 줄까? 나는 손톱만 한 구름 한 조각이라도 담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밤새 이슬을 모으려고 했지. 하지만 그것도 헛일이었어. 이슬이 빠져나간 구멍으로 얄미운 바람만 들락거릴 뿐이었거든.”
“쪼로롱, 네 말을 들으니까 우리 할아버지 말씀이 생각나. 할아버지는 희망을 버리면 살아 서 움직여도 껍질뿐이라고 하셨어. 그리고 자기 꿈을 포기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비겁한 짓이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실망하지 마.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건 아무것도 없대.”, “흥-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몰라. 이건 순전히 네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나는 이제 갈래.”
박새는 파다닥 날갯소리를 남기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항아리는 박새가 날아간 뒤 속이 더 상했습니다. “안 돼! 내가 이런다고 누구 하나 눈여겨봐 주는 것도 아니잖아. 박새 말처럼 나도 어딘가 쓰일 데가 있을 거야. 다만 아직 못 찾았을 뿐이라고!” 항아리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쿨룩쿨룩, 어허, 오늘도 날씨가 좋구먼.” 할아버지는 가마 안을 기웃거렸습니다. “괄 괄 괄….” 할아버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멀리서 자동차가 가을 산을 흔들며 달려왔습니다. 먼지를 뒤집어쓰며 멈춰 선 짐차에서 아저씨와 가람이라는 아이가 내렸습니다. 가람이는 절뚝거리며 널어놓은 항아리를 구경했습니다.
“쟤가 어쩌다가?” 할아버지는 멀리서 구경하는 가람이를 힐끔 돌아보며 말을 얼버무렸습니다. “집에 데리고 올 때부터 저랬습니다.” 자식이 없는 아저씨는 가람이를 고아원에서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람이는 커 갈수록 힘들고 외로웠습니다. 이웃엔 또래의 아이들이 많았지만 아무도 같이 놀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늘 혼자인 가람이한테서 친구라는 낱말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휴우- 그 바람에 틈만 나면 이렇게 데리고 다닙니다.” 가람이 아버지의 한숨 속엔 그동안의 아픔이 다 들어 있는 듯했습니다. “허허, 오늘따라 김 씨가 다른 사람 같구먼!” 할아버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다행히 요즘은 마당 구석에 작은 화단을 만들어 주었더니, 꽃에 푹 빠져 있습니다.”, “허허, 이거 큰일 났구먼. 이제 곧 추위가 들이닥칠 텐데 겨울에는 어쩌누?”, “이제 저 알아서 하도록 놔둘 생각입니다.” 아버지 말 속엔 힘이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도 고개를 연신 끄덕였습니다.
금이 간 항아리는 가람이와 닮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래, 나도 할 일을 찾아봐야지!’ 항아리는 삐뚤어진 입으로 하늘 한 자락을 베어 물었습니다. 가슴이 시원했습니다. 두 사람은 익은 손놀림으로 항아리들을 모두 차에 실었습니다.
“할아버지, 이 항아리 버리는 거예요?”, “오냐. 그건 금이 가고 구멍이 나서 못 쓰는 거란다.” 찌그러진 항아리 앞에 선 가람이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러면 저 주세요.”, “허허허, 그걸 뭐에 쓰려고?”, “멋지잖아요.”, “멋져? 그래. 그렇게 하렴.” 가람이는 할아버지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항아리를 차에 실었습니다. “허허허, 잠깐 기다려 봐라.” 할아버지가 움막 같은 창고로 들어가더니 국수 가락만 한 철사 꾸러미와 펜치를 들고 나왔습니다. “옛날에는 이렇게 금이 간 항아리를 철사로 동여매서 썼단다.” 할아버지는 항아리의 목과 볼록한 배 밑을 철사로 묶은 뒤, 묶은 철사가 빠지지 않도록 위아래를 붙들어 맸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구멍만 막으면 물이 아닌 곡식 같은 것을 담을 수 있을 게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가람이는 귀한 보물을 얻은 것처럼 좋아했습니다. 금이 간 항아리는 가슴이 벌렁거렸습니다. 태어나서 멋지다는 말도 처음 들었고, 따뜻한 손길도 처음이었습니다.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도 겁이 덜컥 났답니다. 금 간 자리가 쩍 벌어지면 사금파리 신세를 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음, 이제부터야!’ 항아리는 마음을 꽁꽁 다져 먹었습니다. 가람이네 집은 좁지만 깨끗했습니다. 국화 향기도 집 안에 가득합니다. 삐뚤빼뚤 벽돌 몇 장으로 만든 화단에 국화들이 색색으로 소담스럽게 피어있습니다.
“엄마, 이거 예쁘지?” 가람이가 내미는 항아리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가가 금세 빨개졌습니다. “여보, 가람이가 옹기 할아버지께 얻은 거야.” 아버지가 엄마를 툭 치며 말했습니다. “응, 어어, 예쁘네. 저기 놓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얼른 웃는 얼굴로 항아리를 받아 들었습니다. 항아리는 벙벙한 가슴을 안고 마루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졌습니다. 먼 산의 단풍도 빛을 잃어 갔습니다. 겨울이 깊어 갈수록 바깥은 잿빛이 되었습니다. 밤을 수놓는 달빛과 별빛마저 얼음 속처럼 파르스름했습니다. 그렇게 매서운 겨울도 봄바람한테는 못 당하나 봅니다. 포근한 바람이 창문 틈으로 솔솔 스며들 때였습니다.
몸이 묵직해졌습니다. 항아리는 봄바람에 취해 감았던 눈을 번쩍 떴습니다. 가람이가 시커먼 흙으로 빈 항아리 속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항아리는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어떤 일이 닥칠지 두려우면서도 은근히 기다려졌습니다.
“가람아, 웬 흙이니?” 가람이 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히히, 오늘 아침에 뒷산을 퍼 왔어요!”, “뭐, 산이라고? 그래 그 산을 어디 쓸 건데?”, “이제 봄이잖아요. 그래서 봄꽃을 심어 보려고….”
가람이가 활짝 웃었습니다. 연둣빛 봄이 웃음 속에서 싹트고 있었습니다. “인석아, 봄꽃이 한두 가지냐? 그러지 말고 차라리 봄을 심어라. 봄을! 하하하!” 아버지 웃음소리에 항아리 가슴속에도 풋풋한 봄이 꼬무락거렸습니다.
가람이가 꽃씨를 심은 지 며칠이 지나자 흙 속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항아리는 흙을 꼬옥 보듬었습니다. 따뜻한 햇살과 어쩌다가 내리는 봄비도 흙 속에 심었습니다.
“엄마, 새싹이 났어!” 가람이와 어머니는 연둣빛 새싹을 보며 활짝 웃었습니다. “어, 이쪽은 내가 심은 게 아닌데?” 가람이가 가장자리에 돋아난 새싹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대로 둬라. 흙 속에 풀씨가 있었나 보다.”어머니는 가람이 손을 꼭 잡았습니다. 두 포기의 새싹은 가람이의 사랑과 항아리의 정성을 먹고 하루가 다르게 자랐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항아리의 들뜬 마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저절로 자란 풀에서 보랏빛 꽃이 피었습니다. “어, 이건 제비꽃이잖아!” 가람이는 두 손으로 감싸듯 항아리를 어루만졌습니다. 햇살보다 따뜻한 손길이었습니다.
행복한 날이 거듭될수록 항아리 눈앞에는 지난 일들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래도 내게는 참 소중한 시간이었어!’ 금이 가고 찌그러진 항아리는 봄빛으로 물든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