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시작 – 문계성 수필가
우리나라의 2017년도 경제성장율은 3%대였다. 2018년도에는 2%대로 하락하더니 2019년 1분기 성장율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그 동안의 경제정책 핵심은 소득주도성장이었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정책의 배경에는 무슨 경제이론이나 정치철학이 있는 것일까. 지식이 일천한 나의 소견은 이렇다.
첫째로는, 최저임금제로서 사업자가 근로자에게 정부가 정한 임금 이상을 지급해야한다는 것인데,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정부가 정한 임금 이상을 지급할 능력이 없는 사업자는 사업을 접어라는 말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가 정한 임금 이상을 지급할 만큼의 부자(富者)만 근로자를 고용하여 사업을 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다면 사업을 접어야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최저임금제가 실시된 후, 100만 여의 영세자영업자들이 문을 닫고, 기업매도 희망 사업자가 줄을 잇고 있다. 이 정부는 돈이 많은 부자들이 사업을 하는 줄로 아는데, 돈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부동산이나 큰돈을 굴려 돈을 번다. 귀찮게 사람 고용하는 사업 따위는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영세한 소기업 사업자들은 대부분 작은 이득이라도 남겨 먹고살기 위해 죽기 살기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정부의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모든 사업자는 근로자들에게 충분한 임금을 지급할 수 있는 부자들인데도, 임금착취로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부도덕한 의도로 충분한 임금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최저임금제의 바탕에는 분명 이런 생각이 있다.
이 정부 사람들은 부자인 사업자들이 근로자들에게 많은 임금을 지급하면, 근로자들이 부유해져 씀씀이가 좋아지고, 그래서 나라 경제가 좋아질 것이므로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이 성립되려면 돈이 많은 사업자가 많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대부분 사업자는 그런 부자가 아니다. 최저임금제는 결국 부자만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 모 정당의 여자 대표의 말이 증명한다. 영세한 사업자들이 이 정책에 대하여 항의를 하자 이 정당 여 대표는 “그만한 돈도 줄 능력이 없는 자가 무슨 사업을 하느냐”며 매우 격앙하여 분노를 표출했다. 나는 이 방송 영상을 보면서 매우 놀랐다. 아마 방속국은, 최저임금제 실시의 도덕성과 이 정당 대표가 근로자를 위해 싸우는 투사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본질은 ‘사업은 돈 많은 부자들이 하는 것인데, 그까짓 적은 임금도 못주는 가난뱅이가 무슨 사업을 한다고 야단이냐!’라는 말이다. 이 분은 입만 열면 서민타령이다. 가난한 사업자는 결국 고용을 포기하고 혼자서 발버둥 치다가 여의치 못하면 사업을 포기할 것이다. 임금은 시장이 결정하는 것이 순리다. 인류는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 대체 세금만 거두는 정부가 무슨 근거로 임금을 강제할 수 있을까. 가난한 사업자들에게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둘째는 아마, 사회는 정의로워야 하고, 사회정의는 평등이라는 관념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관념이 유독이 팽배한 곳이 남미(南美) 국가들이다. 이 평등 관념이 만든 국가 중 가장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나라가 베네수엘라다. 이 나라는 1950년대 초에는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4개국 중 하나였다.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였던가. 이 나라가 하루아침에 거지나라가 되어, 인구 10명 중 1명이 살기 위해 이웃나라로 피난을 가는 신세가 되었고, 인민들의 평균 몸무게가 10kg이나 줄었다. 미인들이 많은 이 나라는, 젊은 여자들이 세계로 다니며 몸을 팔아 가족들을 부양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굶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고양이와 개를 잡아먹어 씨가 마를 지경이란다. 이 나라가 왜 갑자기 이 모양이 되었을까. 어느 때 부터인지 이 나라에 민중주의를 부르짖는 좌파적 정치 집단이 생겨났다. 이 좌파의 정치철학은 평등이다. 이들의 평등은 존재적 평등이 아닌 부(富)의 평등이다. 국가가 부의 평등을 이루는 방법은 보통, 부자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두어 복지에 쓰는 것인데, 이 방법은 말이 많고 거두는 돈도 성에 차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정부가 자본과 사업을 국유화하여 인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일 것이다. 그래야 세금 가지고 국민들과 싸울 필요도 없어진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일종의 배급으로 발전할 것이다. 물론 이 배급의 이름은 ‘평등한 민중 삶을 위한 복지’일 것이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참으로 고상할 수도 있고, 참으로 간교할 수도 있다. 엄청나게 부지런하고 자기 책임적일 수도 있고, 엄청나게 게으르고 방관적이 될 수도 있다. 이 두 극단은 국가나 개인의 철학에 의하여 비롯된다. 카톨릭 세계인 남미(南美)에, 20세기 후반을 휩쓴 신학은 해방신학(解放神學)이었다. 민중주의가 남미를 휩쓴 것과 유관할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민중신학이 유행했다. 민중주의를 부르짖는 권력엘리트들은 민중을 향하여 평등과 복지를 약속하고, 이를 빌미로 국가 재산의 국유화를 유도하고, 국유화된 재산으로 손쉽게 퍼주기를 한다. 이 퍼주기가 바로 매표(賣票)로 연결된다. 이들은 복지를 빌미로 한 매표행위로 지지를 유도하고 권력을 유지한다. 베네수엘라에서 이런 행위를 작심하고 한 사람이 ‘우고 차베스’였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작심하고 퍼주기를 시작했다. 사업화되지 않은 농업국가인 이 나라의 부(富)는, 세계 최고 매장량을 자랑하는 석유에서 나왔다. 말하자면 이 석유를 팔아서 복지를 핑계로 퍼주고, 그와 이념을 같이하는 나라에도 석유를 공짜로 퍼 주었다. 아마 이들 권력 집단은, 이들이 가진 석유가 거의 무한하고, 석유는 제한된 자원이므로 갈수록 석유가가 고공을 칠 것이므로 그 돈으로 무상복지도 무한히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동안에는 권력이 유지될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이다. 공짜를 받아먹는 인민들은 참 행복했을 것이다. 이들은 석유를 판돈으로 나라를 산업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들 권력 엘리트의 일부는 마약사업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말도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석유가가 영원히 높은 가격을 유지할 수는 없다. 새로운 유전이 개발될 수도 있고, 새로운 저비용 석유시추 방법이 개발될 수 도 있고, 석유대체에너지가 개발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석유가를 낮출 수 있는 요인이다. 세계의 석유가가 하락하자,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나라는 거덜이 났다. 이 나라의 경제구조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잘 말해준다. 이들은 그 취약한 플라스틱 조각을 콘크리트 바닥으로 알고 그 위에서 춤을 춘 것이다.
우리는 고생스럽게 수출을 해서 돈을 벌어 쓰면서, 세계 11위 경제대국이라는 자찬을 늘어놓고 있다. 더욱이 이 말을, 온갖 말로 산업화를 반대하였던 세력들이 ‘이제는 쉴 때도 됐고, 나누어 먹을 때도 됐다’며 잘 사용한다. 부존자원도 없이 수출로 먹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달프고 불안한 일이다. 언제 수출이 감소될지 알 수 없다. 만약 미국이 어느 날 우리의 상품에 중국과 같은 높은 관세를 매긴다면? 혹은 어느 날 갑자기 동맹관계를 부정하고 수입 중단을 선언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나라가 삼성의 핸드폰보다 더 질 좋고 값싼 물건을 만들어 판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베네수엘라에서 석유가가 하락한 일보다 더 큰 충격이 쓰나미가 되어 밀어 닥칠 것이다. 지금보다 형편이 훨씬 좋았던 3년 전에, 우리나라를 ‘헬 조선’이라고 조롱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 ‘세계 11위 경제대국’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뜯어 먹을 핑계를 찾는 사람들이다.
베네수엘라는 우리나라 보다 조건이 훨씬 좋다. 땅이 우리나라의 4배이고 농업과 목축에 적합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전쟁이 발발한 위험도 없다. 그런데 이 나라 사람들은, 왜 굶주리고 살기 위하여 다른 나라로 떠나고 몸을 파는가? 무식하게 평생 노동만 팔아서 살아온 나의 경험으로 본다면 이렇다. 아마 이 나라 국민들이 국가로부터 얻어먹는데 이골이 나서,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할 자력갱생의 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사육한 호랑이는 성장해서도 사냥할 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국가가 복지라는 이름으로 부(富)를 전부 탕진해버려 투자할 돈이 말라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이 전부 세계로부터 빚 독촉을 당하는 빚쟁이가 되었다. 배급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투자할 돈을 비축해두었겠는가? 그들은 배급으로 생존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빈손이 된 사람들이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복지라는 배급 세상이 불러온 악몽 같은 세상을 우리는 여실히 보고 있다. 복지라는 달콤한 이름의 배급사회가 이 나라 비극의 시작이었다. 나는 왜 베네수엘라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가 염려될까? 그래서 자주 이런 글도 쓰게 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