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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김경애, “원폭피해 진상규명에 대한 더 다양한 연구와 연대활동에 적극 나서야한다”

피폭당한 한국여성들의 고난을 생생한 증언들로 담아낸 책, 『원폭피해 한국 여성들』 (김경애, 푸른사상사, 2019.02.28)

1949년 부산 출신으로 서울에서 여성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다 5년 전, 남편(변을유 합천근화재단 이사장)의 고향에 정착한 김경애 씨는 지난 2월,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입소자들을 비롯한, 원폭피해 한국 여성들의 다양하고 고단한 삶을 다룬 『원폭피해 한국 여성들』을 출간했다.
이 책은 그 동안의 단편적인 구술사례를 넘어 여성문제의 관점까지 더해 분석한 첫 작업이기도 하다.
7월 5일(금) 오전, 대양면 대목리 사곡마을 자택에서 김경애 씨를 만났다. 아래는 그와 나눈 얘기다. /임임분 기자

여성학자가 된 계기가 있다면?
-학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졸업 뒤 학교 학보사 상임 사진기자 활동을 했다. 이화여대 여성학과 조교 일도 하게 되었고 뒤이어 여성단체 실무도 하면서 미스코리아 폐지·탁아소 설치 운동 등을 했다. 여성학 책도 없을 때 영어책으로 강독하면서 공부하다가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 생기면서 처음 입학, 졸업하고 이화여대 여성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도 있다가 마흔 살 가까이 되니 남편이 못갔던 유학을 다녀오라고 권해서, 준비가 어려워서 좀 머뭇거렸지만, 만 40세에 유학 갔다. 당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시누이와 남편에게 맡겨놓고, 1년 유학을 다녀왔다. 이화여대 여성연구소에서 일할 때 이화여대 앞 염리동 여성들을 위한 탁아소 설치 운동, 직업훈련, 자활사업으로 물품 만들면 백화점과 연결해서 같이 팔기도 하고 했는데, 유학에서 쓴 논문은, 이 시기에 본 가난한 여성의 노동에 대한 내용이다. 인천에서 1년 있으면서 자료 모으고, 애들 데리고 다시 영국 가서 학위 마무리 하고 한국 와서 동덕여대 교수 일 하면서 여성학자로 살았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봤을 때, 기억에 남는 일과 아쉬운 일이 있다면?
-1999년인가, 조선일보가 ‘21세기를 전망한다’면서 각 분야 전문가와 좌담하고 기획기사를 냈는데 나도 여성학 분야 대표집필을 하면서 대중에게 ‘성폭력’이란 단어를 처음 선보였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성폭력’이 너무 은폐되고 있다, 성폭력으로 실제로 신고되는 일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99%는 은폐되어 있다고 얘기했지만, 그 은폐가 어떤 식으로 되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히 추측만 했지 더 깊이 파고 들어 밝히지 못했다는 점은 굉장히 후회한다. 요즘 미투운동 보면, 그 때 좀 선진적으로 했으면 좋았겠다 싶다.
보람 있었던 점은, 우리나라 최초 근대 여성작가인 탄실 김명순에 대해 쓴 논문이다. 당시 문학계의 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김동인, 김기진, 전영택 등이 김명순에 대해 ‘피가 더럽고 부도덕한 여자, 연애지상주의자’니 어쩌니 하면서 매도하고 폄하하고 조롱한 자료를 우연히 보게 됐고, 심지어 현대여성평론가들조차도 그렇게 평가하는 작태를 보며 논문을 쓰게 됐다. 1896년 평양 출신 김명순은 김명순 모친이 평양 기생 출신이고 이 모친은 평양 부호의 첩이었으나 영민한 문인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이자 우리나라 육군 참모총장 1호가 되는 이응준에게 데이트강간을 당한 충격에 도쿄의 강에서 투신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불운한 여인이기도 하다. 이 사건을 실명으로 일본신문에 실리고, 그 기사를 한국 신문이 받아 쓰면서 사건이 여과 없이 알려졌다. 요즘도 그런 사건이 기사화되면 난리가 나는데 그 당시에는 어떠했겠는가? 김명순은 너무 가난해서 도쿄 YMCA 뒷뜰에 천막 치고 살다가 결국 아오야마 정신병원에서 1950년대에 죽었다. 이런 김명순에 대한 평전을 여성신문과 함께 기획해 준비하고 있다. 김명순이 데이트성폭력 피해자에다 언론 등을 통해 2, 3차 가해가 되었다는 점은 요즘 독자가 보기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김동인은 자기 소설 『김연실전』에서 아주 성적으로 부도덕하고 문란한 여성 얘기를 썼는데 그 모델이 김명순을 모델로 했다는 말이 퍼졌다. 김동인은 김명순과 같은 평양 출신에, 김명순의 이복오빠와 친구이기도 해서, 김명순이 어릴 때부터 “오빠,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 다니는, 개인적으로도 잘 아는 사이였는데도 그렇게 폄하했다. 여성신문에서 김명순 탄생 120주년기념 겸해서 관련 내용을 써서 기고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많이 봤고, 그 흐름에 맞춰 손석희가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도 김명순에 대해 내 글을 인용했다. 최영미 시인의 고은 시인에 대한 성추행 문제제기한 일처럼, 근대부터 우리나라 수많은 남성작가들이 여성을 무시하고 성희롱하고 성폭행 대상으로 여겼던 전례가 있다는 점을 다루고 알렸다는 점, 보람 있었다.

지난 2월, 《원폭피해 한국 여성들》을 출간했다. 출간 배경, 과정, 이후 평가에 대한 소감이 궁금하다.
-2014년 9월에 은퇴하고 합천으로 오면서, 더 이상 집필은 하지 않으려고 쓰던 학용품이나 책을 제자들한테 다 나눠주고, 합천여고의 학생들이나 젊은 직원들이 보면 좋겠다 싶은 책은 학교에 기증도 하고 내가 볼 책은 몇 권만 남기고 살 작정이었다. 그렇게 합천에 와서 뭐 할까하고 생각하면서 마당의 꽃들 가꾸고 지냈다. 대구 오갈 때 차 타고 지나가면 보게 되는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아래부터는 ‘원폭복지관’) 앞을 지나다니면서, 우리나라에도 원폭피해자가 있구나, 합천에 저런 곳이 있구나, 저기 가서 자원봉사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면서도 뭔가 자신이 없기도 했다. 합천군청이 원폭피해자 실태조사를 한다고 신문에 나왔고 도울 수 있는 일이 있겠다 싶어서 문의를 해봤으나 결과적으로 그 조사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기존사례 수집해보니, 그 사례는 초창기 자료 중심에 최근 자료 일부였다. 내가 여성학을 했으니 여성 중심 자료를 보려 하니, 그 자료는 더더군다나 없어서, 원폭복지관 입소자 인터뷰를 하겠다고 찾아가니 강수한 사무국장이 “전문 연구자가 방문해서 연구하는 일은 처음”이라며 반가워해주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2016년 7월부터 10월까지 거의 매일 찾아가서 인터뷰를 했다. 일본에서의 삶, 특히 어떻게 노동했고 살았나를 묻고 묻고 물었다. 정리하다 보니, 뭔가 앞뒤 맞지 않는 인터뷰 내용이 자꾸 나와서, 출간 직전인 지난해 10월까지도 보충인터뷰해서 완성했다.

그 작업에 함께 한 이들이 있는가?
-서울 사는 후배가 이화여대도서관에서 논문 모아주고, 국회의원 친구 가운데 원폭피해자를 위한 법안 대표 발의한 이가 있어 그에게 국회도서관 자료는 부탁해서 소포로 받고 보고 보내고, 국사편찬위원회 가서 자료 보면서 옛 사례조사도 많이 인용했다. 현재 원폭복지관에 있는 분들과 초기에 사망한 자들 자료도 함께 분석하기 위해 초기 자료들을 보았고 그 자료 입력하는 일은 서울에서 국어교사로 일하다가 은퇴한 동서가 도와줬다.

『원폭피해 한국 여성들』에 대한 평가는?
-무엇보다 한국의 원폭 피해자를 위해 40년 넘게 도와주고 『한국의 히로시마』라는 책도 낸 이치바 준코 씨가 책 나오기 전 원고 감수도 해주고, 책 출판에 대해 굉장히 기뻐했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논문, 책이 많고 우리가 학교에서도 그 역사를 배우지만, 일본 사람들이 그 시기 우리나라에 대해 경제수탈하고 고통을 준 역사는 굉장히 추상적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잘 모른다. 이번 인터뷰에서 만난 이들이 그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줬다. 강제징용이 얼마나 비참했는가, 구체적인 증언을 실을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인용자 중에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인, 대목리 출신이 있다. 집 바로 옆 개울에 얽힌 어린 시절 얘기를 해주는데, 반갑기도 하고 너무 마음이 착잡하고 공감이 되고 그랬다. 일제강점기, 그 시절에 외진 합천에서만 산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어린 자식 포함 가족을 이끌고 부산을 거쳐 야매배를 타고 일본에 가는 일은 얼마나 절박했을까, 일제강점기의 지배로 힘들게 살았던 상황은 누구라도 그 구조에서 빠져나오기 힘들고 그래서 겪어야했던 고통이고, 그 힘들고 어렵고 두려운 일을 겪어야 했던 상황을 상상하면 여전히 마음이 많이 아프다. 합천의 잦은 홍수와 가뭄으로 겪어야 했던 경제난에 비하면, 고생스러워도 일본 가서 밥은 먹게 됐는데 얼마 못가 원폭피해를 당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이들을 생각해보자. 그 귀향길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죽었는지 정확히 모른다. 한 인용자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뱃길에서 두 번째 배를 탔는데, 앞선 배가 열악한 야매배가 침몰해 조각조각 둥둥 떠 있는 모습 본 얘기, 자기가 탄 배도 물이 새서, 낯선 섬에 들러 배 고치고 하느라 또 며칠을 기다리고 했던 얘기를 생생하게 한다.
지금 우리가 이만큼 사는 덕도 그들의 희생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본다. 그 고난이 그들의 무능함 탓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구조, 체제에 들어가면 누구도 살아남기 어려웠다는 점을 알아줘야 한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 때 당한 일, 원자폭탄 맞고 겪는 피해가 뭔지 모르니까, 그냥 폭탄인 줄 알고 당했고, 그 이후에 사람이 죽어나가고, 왜 죽는지도 모르고, 알아도 돈 없고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 치료 받지 못하고, 경제난이 이어지는 삶을 살았다.
한국 원폭피해자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의 시작은 1960년대 한일협정 이후, 일제강점기 때 함흥 쪽인가, 그쪽 출신으로, 패망 뒤 일본으로 돌아간 히라오카 타카시라는 인물이다. 그는 한일협정 이후 한국으로 취재 왔다가 처음 한국 원폭피해자에 대해 알게 되어 취재했고, 《편견과 차별》이라는 재일동포 차별에 대한 책도 쓰고 일본 중부방송 사장, 히로시마 시장도 한 분인데, 한국 원폭피해자를 위해 아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는 1968년 일본으로 밀항해서 원폭병 고쳐 달라 한 한국인들 도와주고, 한국에서 만난 원폭피해자들을 일본에 초청해서 일본 정부와 일본 언론에 그 사실을 알릴 수 있게 도와줬다.
이치바 준코 씨를 비롯한 지원단체 소속 여러 일본인까지, 한국 피해 당사자의 노력 뿐 아니라 한국 원폭피해자 구제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이치바 준코씨는 해마다 합천비핵평화대회 시기에 직접 와서 함께 하는 참 고마운 분이다. 현재 일본과 관계가 나쁘지만, 이들의 진정성 있는 활동에 대해 우리는 기억하고 고마움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합천사람이 유독 원폭피해자가 많은 까닭은?
-살 길 찾아 일본에 먼저 간 합천사람들이, “일본 가면 밥은 먹고 산다”고 한 명 한 명씩 소개했다. 히로시마는 당시 군사도시로 한창 노동력이 필요했고 일본이 먼저 간 합천사람 내세워, 친인척에 지인까지, 적극적으로 노동력 모집에 나섰다고 한다. 그렇게 간 남성인력이 나머지 합천 가족을 뒤에 부르고, 혼자 간 사람은 합천에 와서 혼인해서 다시 일본으로 가고. 거의 다 연줄로 간 상황이라 히로시마 한국사람은 고향이 어디냐고 애써 따로 물을 필요도 없이 다 합천사람이라고 할 정도. 칸칸이 만든 좁은 구조물에 한국인이 사니 ‘조선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혼자 온 사람들은 함바에서 집단하숙하고 그 함바 주인은 공사반장으로 일 따고, 그렇게 딴 일은 대개 일본인이 기피하는 위험한 일이고. 친인척과 지인들이 모여 사는 구조였는데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친정중심 생활도 있었다.

김명순 평전 외 농촌 고령 여성에 대한 기록을 준비한다고 알고 있다.
-80대 이상 여성의 삶을 기록해서 책으로 내고 싶다. 우리 위 세대 시집살이의 엄혹함에 대한 얘기는 풍문처럼 많지만 이를 기록정리하고 분석하는 글은 없어서, 하고 싶었다. 김명순 평전 작업은 나의 오랜 숙제이기도 해서 하고 있지만 내가 작가도 아니고 그래서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서 자료 조사를 하고 있다. 자료수집이 어려워 주저했는데, 김명순의 인생경로를 따라가며 살펴보고, 김명순의 글에 자전적인 내용이 많으니 그에 맞춰 연도와 지역별로 구성하고(평양, 서울 가회동, 평양, 도쿄, 교토 등 여성신문 연재와 책 발간 형태로 준비하고 있다.
80대 여성들 인터뷰는 우리 친척부터 시작해서 경상도 여인들의 시집살이를 다룬다. 내가 아는 얘기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그들이 자기 삶을 얘기하는 부분이 궁금하다. 김명순 평전 끝내고 이어 할 예정이다.

마침 성평등주간이고 곧 합천비핵평화대회(8/5~6)도 한다.
-원폭피해자에 대해 누군가 연구하겠다고 하면, 관계 기관이나 단체는 적극 도와야 한다. 나 또한 원폭복지관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책을 못썼다. 일본 위안부 문제가 지금처럼 확대되고 활발하고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당사자의 용기 있고 꾸준한 활동 뿐 아니라 그들을 지원하는 다양한 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의 노력이 함께 있었다. 이번 책 발간을 위해 내가 모은 자료를 자료관에 기증할 생각도 있다. 모아놓은 자료를 잘 관리, 활용하고, 연구자료를 쌓아내고, 비핵평화대회 같은 활발한 대외홍보를 하기 바란다.

마을 주민들과의 교류, 어떻게 하고 있는가?
-동네 여성들과 친하게 지낸다. 마을회관 가서 같이 밥도 지어 먹고, 돌아가면서 외식하러 가서 밥도 사고. 요즘은 농번기 지났으니 초저녁에 같이 운동도 한다.

지역 여성민들의 삶, 지역민과의 일상에서 여성학자로, 지역민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세상은 많이 변했고 여성의 삶도 나아졌다. 2000년대, 정부와 일할 때만 해도, 양성평등에 대해 얘기하면 남성들도 공감하고 적극 협조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제로섬게임처럼,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쉬(backlash 반작용)이 생겨 갈등이 심하고, 인터넷댓글을 보면 무섭다. 서로에 대한 증오, 혐오가 안타깝고 속상하다. 나는 학생시절에 학교수업보다 도서관의 다양한 책을 읽었다. 책 읽는 능력만 있으면,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다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성적 중심의 1등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삶은 오산이다, 이 세상의 많은 지식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의 일부와 책에서 얻는 엄청난 지식, 경험으로 구성된다. 학교공부와 성적으로 잘 살 수 없다. 남과 다른 내가 있고 남과 다른 나의 무엇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퇴직 후 음악 듣고 꽃을 가꾸며 시간을 보낸다는 시골집 정원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