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을 공유하는 지자체와 연구단체 힘 모아 문화탐방 노선 만들자”
‘남명 조식과 남명학의 공간 합천’ 학술대회
7월 5일(금), 합천군청이 주최하고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가 주관한 <남명 조식과 남명학의 공간 합천>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합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
이상필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가 <남명 학문의 변전시기와 서규암소증대학책의하(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 소고>라는 제목으로 “남명이 위기지학을 학문의 방향으로 잡은 시기는 31세라고 본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언급했고 이에 동조하는 연구자가 많았으나 기존의 설이 옳다고 하는 연구자도 여전히 있어 이번 학술대회에 다시 강조하려고 한다. 남명이 제자들에게 밝힌 시기(25세설과 26세설)와 남명이 남긴 기록에 남은 시기(31세설)를 두고, 어느 쪽을 정확한 시기라고 선택하는 문제라는 난제가 있기는 하다. 나는 31세설이 맞다고 본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에 대해 윤호진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상필 교수의 주장에 공감하면서 의문이 드는 점은, 남명의 제자들이 31세설에 대해서는 언급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고 지적했다.
권난희 경상대 한문학과 강사는 <한훤당화병발(寒暄堂畵屛跋) 분석>이라는 제목으로 “남명의 산문작품 가운데 하나인 <한훤당화병발>은 제작연대가 밝혀진 남명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마지막 작품으로 71세의 원숙한 시기에 저작되어 작가의 정체성이 오롯이 녹아있고 얼개 또한 훌륭하다. 유가적 의미의 자연스러움과 사욕을 경계하는 문구는 과욕적 정신세계를 추구한 작가의 세계관이 잘 짜인 작품”이라고 밝혔다. 이에 김종구 남명학연구원 사무국장은 “남명의 인물성과 당대의 현실, 정치 상황에 초점을 맞추면 어땠을까?”라고 언급했다.
정우락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합천지역 남명 조식의 문화론적 독해>라는 제목으로 ‘합천지역의 남명 유적, 남명 유적이 지닌 의미, 남명 유적 활용방안’ 등에 대해 발표했다. 특히 ‘남명 유적 활용방안’에서 뇌룡정을 중심으로 ‘신명사도’를 기반한 신성(神性) 찾기 프로그램 개발, 합천 등 남명의 흔적을 공유하는 지자체와 남명학 관련 단체가 협의해 문화탐방 노선 개발, 복설된 용암서원 활용성 제고, 함벽루 중심으로 한 회통 문화를 새로 구성해보자고 제안했다. 이에 강정화 경상대 한문학과 조교수는 “최근 온 나라에서 ‘인문학 대중화’ 열풍이 불지만 연구자가 직접 개입, 합류해 이에 부응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 남명학의 대중화는 쉬운 일이 아니라 회의적이다.”라고 지적했다.
구진성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합천 거주 남명문인 집단의 계보와 그 특징>이라는 제목으로 ‘합천권 남명 문인의 규모, 임진왜란 의병 활동과 인조반정 이후의 타격, 용암서원 건립과 《산해사우연원록》 편찬’에 대해 발표했다. 이에 김현진 경상대 한문학과 강사는 “구진성 연구원의 발표내용에는 다 동의한다. 다만, 이번 발표가 기존 연구성과와 어떤 차이가 있고 더 발전된 부분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언급했다.
청객 발언으로 조찬용 씨는 “남명제와 선비문화축제 때 <남명선생 선양회(회장 조찬용)>는 5년 전부터 공식적으로 참석하지 않는다. 덕천서원에 내암을 종향하지 못하는 사이비 남명정신이 판을 치고 있어 역겨워서 그런다. 안동은 ‘이황·유성룡·김성일·이상정’ 4인을 합사(合祀)해서 배향하는 호계서원(虎溪書院)까지 45억원으로 복원하고 있다.”고 하자 이상필 교수는 “조선시대도 아니니 덕천서원과 용암서원 유생들이 모여 의논해 결정하고 배향하면 될 일”이라고 답했다. 김무만 씨는 “남명의 학문이 최고조로 이른 시기의 체류지가 용주면 손목리에 있는 <벽한정>이라고 알고 있는데 오늘 발제자들 포함 연구자들의 얘기는 다르다. 정확히 어디라고 해야 하는가?”라고 질의했다. 이에 이날 지정토론 진행을 맡은 허권수 경상대 한문학과 명예교수 포함 토론자들은 “남명의 연구지를 딱히 어느 한 곳이라도 얘기하기는 어려운 문제”라고 정리했다.
합천지역에서는 처음 남명 조식을 지역사회 활성화에 끌어들이겠다는 의지로 마련한 이번 학술대회는 예산 2천만원으로 마련됐다. 합천과 남명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은 높으나, 지역사회의 공론화는 남명의 ‘경의사상’을 현실에 맞게 계승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다. 이후 연관된 사업에서 어떻게 발전시켜 활용할지 지켜봐야겠다. /임임분 기자
*남명 조 식: 조식(曺 植, 1501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1572년 2월 21일(음력 2월 8일)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다.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다.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조 식(曺 植)의 자(字)는 건중(楗仲)이며, 경상도 삼가현 사람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유일(遺逸: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 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했다.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 명의 문도를 길러냈으며, 대체로 북인 정파를 형성했다. 사후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1613년(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남명학(南冥學): 조선 시대에 성리학의 한 종류로, 경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과 의를 중심으로 하는 의리를 추구했다. 즉, 난세(亂世)에는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일관해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反窮體驗: ‘자신에게 되돌려 체험하다’라는 뜻으로 성현의 가르침을 배워서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몸소 체험하는 실천 정신)을 중시해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하고, 의리정신을 투철히 하여 비리를 용납하지 않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조 식의 사상이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