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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僞善)의 나라 – 문계성 수필가

지난 9월 9일 새로 임명된 조국 법무부 장관은 청문회에서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는 자신이 ‘자유민주주의자이며 동시에 사회주의자’이며, ‘우리 헌법 내에서 사회주의 정책이 필요하며’, ‘사회주의의 가치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며,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했다. 과연,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한 국가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 이 두 개의 관념이 개인의 한 영혼에서 동거하며 공존할 수 있을까? 자유민주주의에서의 개인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스스로의 선택과 노력으로 경제활동을 하며, 이 경제활동의 과실인 재화를 사유(私有)하는 존재다. 그는 스스로 생존방법을 찾고, 개인이 처분할 수 있는 재화를 소유함으로서 삶을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된 개체가 된다. 그래서 그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함으로 모두에게 공정한 게임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 사회는 공정한 룰(rule)을 가질 수 있고, 그 룰이 지켜지는지를 서로 감시하게 된다. 그래서 그 사회는 공정할 수 있다. 공정한 게임에서 벗어난 개인은 소외된다. 사회주의에서의 개인은 무엇인가? 사회주의는 토지와 자본을 국가가 소유한다. 사회주의의 발전된 단계로, 설사 배급경제가 아닌 시장경제를 한다고 하드라도 이는 국가자본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 체제로서 국가 권력을 한 당이 소유하고, 국가 룰 또한 권력을 장악한 하나의 당이 정한다. 결국, 당을 장악한 우두머리가 사실상 국가 자본과 룰의 지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 개인은 룰과 자본을 독점한 당에 충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때 개인은 국가나 전체라는 대의를 위하여 존재할 뿐이다. 전체를 구성하는 개체로서의 존재일 뿐이며, 인간이 갖는 독존적 존엄은 없다. 그가 생산했지만 사유할 수없는 재화는 누가 가져갈까? 국가가 가져갈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수탈자를 자본가로 가정한다면,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수탈자는 국가로 가정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국가를 수탈자로 부르지 않으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본가를 수탈자로 불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 공평한 논리가 아닌가?
새 법무부 장관을 그의 위선적이거나 범죄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임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사회주의적 가치로서 ‘경제민주화’나 ‘토지공개념’을 이야기했다.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화를 부정하는 개념으로, 공산주의가 권력을 장악하면 가정 먼저 실시하는 것이다. 아주 교묘한 언어인 경제민주화는 대체 무슨 말일까? 말 그대로는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는 이 말의, 그 구체적 속뜻은 사유재산을 제한다는 말이다. 가진 자의 재산을 빼앗거나 혹은 구조적으로 재산 취득을 제한하여 물질적 평등을 이루겠다는 말로서, 결국, 토지와 재화를 국가의 통제 하에 두는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겠다는 말이다. 당신은 사유(私有)와 공유(共有)의, 이 서로 다른 두 개의 관념이 과연 한 사회에서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가? 나는 이 주장이 기만이거나 전술적 언행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교묘한 언어에 기만당한다. 우리 식민시대의 청년들이 열광했던 사회주의는, 인간평등과 사해동포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그랬는가? 그 종주국인 소련은 동구라파의 작은 나라들을 위성화하고, 중국은 인접한 약소국가들을 전부 잡아 먹어버렸다. 동물에게는 위선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말과 행위가 다른 위선이 있다. 말에 이용당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나치즘은 어떤가. 당시 독일 백성들은 나치의 그 달콤한, 위대한 아리안 이야말로 로마 대제국을 이을 제3제국을 건설할 자격이 있다는 말에 매혹 당했다. 텐노주의(천왕주의)는 어떤가? 선택된 조몬족의 일본이야 말로, 마땅히 대동아를 다스릴 권능이 있다는 말에 백성들이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나치즘과 텐노주의의 종말은 파멸이었다. 말을 들을 때는 그 속뜻을 새겨야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다. 사회주의는 이질적이거나 적대적 관념집단과는 절대 공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주의와도 상통한다. 사회주의는 전체주의 체제로서 획일적이며 배타적이다. 이들은 상대가 사라질 때까지 폭력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러시아가 소위 혁명을 하면서 7천여만명의 사람을 학살한 사실을 안다. 지금의 남북한을 합친 인구를 학살한 것이다. 중국이 인민내부의 적을 축출한다는 명분으로 죽인 사람은 얼마인가? 폴포트 정권이 캄보디아 혁명을 구실로 죽인 사람은 총 인구의 3분의 1이었다. 이들 사회주의자들은 그 아름다운 이름과는 달리 참으로 잔인하다. 관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을 청소한다. 그래도 사회주의와의 공존이 가능한가?
우리가 관용하고 있는 허위의식은 어떤가? 개발독재 19년에 대해는 이를 갈면서도, 북한의 3대 세습과 인권말살에 대한 비판은 증오한다. 3대세습의 독재를 더욱 증오해야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가? 개발독재를 증오하면서 그 달콤한 과실을 즐기는 것은 어떤가? 과실을 만든 과정은 증오스럽고 그 과실은 달콤한가? 세계 11위 경제대국 운운하면서 말이다. 공공연히 미국을 착취적 제국주의 국가로 증오하는 말을 내뱉으면서, 그 자식들은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이중성은 어떤 설명으로 설득이 가능할까? 남미의 열악한 경제상황이 미국의 신자유주의 탓이라는 논리까지 동원하여 미국을 증오하면서 말이다. 이들의 그 인간적으로 보이는 언변에 감동하여, 젊은 시절을 사회적 출세나 피땀이 없는 재화를 경멸한, 그 어리석고 순진한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는 언제까지 이 가식(假飾)에 관용해야할까?
새 법무부 장관은, ‘포기할 수 없는 사회주의의 가치’를 부르짖으며 끝없이 부(富)의 축적을 꾀했다. 사회적 성공과 더불어 부의 축적에도 성공했다. 사회적 출세를 모욕하며 얻은 그 성공과, 부자를 모욕하며 얻은 그 많은 재화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었을까? 승리감을 안겨 주었을까? 부끄러움은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