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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버지의 죽마고우 – 김호연 쌍백출신 향우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1934년에 경남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돌인젓) 봉양재에서 입학해 쌍백 공립심상소학교 4회 졸업예정이었는데 학교 개편에 따라 4회 졸업생 전원 5학년으로 편입해 6년제로 1940년에 쌍백공립심상소학교 제5회 졸업생이 되셨다. 그 후 1941년 4월 1일 쌍백공립초등학교로 변경되었다. 아버지가 학교 다닐 때 정방수 선생님과 단짝친구였다고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나는 6학년 때 배구선수생활을 했다. 어느 여름날 학교운동장 서쪽 배구코트 장에서 잠간 쉬고 있었는데 교장 선생님께서 내 옆으로 오시더니 “부친이 김재규 맞제? 부친 잘 계시냐?” 하면서 안부를 물어 오셨다. 순간 당황해서 대답도 못하고 어정쩡한 표정으로 있었다.
“내가 네 부친과 한 책상에서 공부했다. 학교 다닐 때 단짝친구였지. 네 부친은 다른 과목도 잘했지만 특히 산수는 우리 반에서 가장 잘했다. 나는 네 부친보다 더 잘해보려고 열심히 했지만 네 부친만큼은 못했다. 네 부친은 인품도 훌륭했지만 머리도 아주 명석했지. 집안사정으로 시골에서 농사짓고 있지만 공부를 했으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참 아까운 사람이야.”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라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그날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전해 드렸더니 아버지는 “참…선생님이 별말씀을 다 하셨구나.”라고 했다. 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학교 육성회장 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교장 선생님과 친한 친구 사이인 줄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뒤 교장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어머니가 주안상을 갔다 드리라고 불렀다. 두 분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점잖은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두 분 앞에 상을 놓고 나오려는데 교장 선생님이 인자하시고 다정한 목소리로 “잘 먹을게. 어머니에게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라.”고 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부끄럼이 많았는지, “선생님! 맛있게 드세요.”라고 인사도 못 드리고 바보 같이 모기만한 소리로 “예.” 하는 대답만 겨우 하고 나와 버렸다.
방학 때면 아버지와 교장 선생님은 가끔 만나셨다. 장기를 두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어찌나 두 분이 점잖으신지 서로에게 늘 예의를 갖추고 대화를 나누며 약주를 조금씩 나눠 드시며 행복해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쌍백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아버지의 죽마고우(竹馬故友)라 자랑스럽기도 했다.
정방수 선생님은 1962년 2월 28일 쌍백초등학교 제11대 교장 선생님으로 부임해 오셨다. 자신의 모교였기 때문인지 남달리 학교에 많은 애정을 보이셨다고 아버지가 얘기한 기억이 있다. 1963년도에는 학생들 독서를 위해 도서관을 만들었고 1966년도에는 학생들 정서를 위해 맑고 깨끗한 연못을 만들어 형형색색 잉어들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했다. 학생 수가 많아 오전, 오후로 반을 나눠다니는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1967년에는 동편 4교실을 신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1967년도에 문교부 지정 체육과 연구학교로 지정, 1969년도에는 교육부 지정 체육과 연구발표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쌍백초등학교에 9년 6개월 근무하다 1972년 8월 30일 1학기 마치고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셨다. 역대 교장 선생님 중에서는 쌍백초등학교에 가장 오래 계셨다.
교장선생님이 전근 가는 곳마다 아버지가 찾아 갔다. 즐거울 때나 외로울 때 항상 같이 하시는 모습이 참된 지란지교(芝蘭之交)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다정하게 지내셨는데 교장선생님께서 마지막 근무했던 김해 어느 학교에서 퇴임을 하게 되자 아버지는 그때도 함께 한 뒤 부산 우리 집에 오셨다. 아버지는 매우 아쉬워하는 얼굴로 “정방수 선생이 오늘 정년퇴임을 했다.”고 얘기하셨다. 그 뒤에도 두 분은 가끔 만나시는 듯 했다. 정방수 선생님이 평생을 교육에 헌신하셨는데 노후에 고생 하신다고 많이 안타까워하시던 아버지! 정방수 선생님이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고 서운해 하던 아버지는 “그렇게 훌륭하고 참된 좋은 벗 이었는데 이렇게 떠나는구나.”하고 허공을 바라보는데, 그 쓸쓸해하는 모습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본인도 고령인데도 혈육이나 다름없는 죽마고우의 마지막 가는 길 작별인사라도 한다고 장례식장에도 다녀오셨던 아버지는 결국 그 상심으로 며칠 몸져누우시기도 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