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임분이 만난 사람(4) – 효부상 받은 가곡 이수자 김정란, “도리를 지키며 살았다”
요즘 시절에 효자, 효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이가 몇이나 될까? 지난 9월 30일(월), 신성동우회(회장 김용균 前 국회의원)가 주관한 제35회 효자·효부상 시상식에서 효부상을 받은 김정란 씨를 10월 14일(월)에 만났다. 아래는 가곡이수자 예술인이기도 한 김정란 씨와 나눈 얘기다.-임임분 기자


본인 소개 해달라.
1960년 경북 군위에서 태어났고 시어머니 중신으로 28살에 합천 사는 남자와 혼인하면서 합천군민이 됐다. 합천읍 정대마을에 살고 있다. 남편 본가도 대구로 합천 토박이는 아니다. 5남매 막내인데 5남매 맏이와 혼인했다. 합천에서 32년째 살고 있고 남매를 낳고 키웠는데 다 외지에 산다. 석암 정경태, 국당 백학정 선생님에게 가사를 배운 뒤 중요무형문화재대구시가곡5호문화재이자 석암 선생님 제자인 권일지 선생님에게 가곡 배운 뒤 2016년 중요무형문화재대구시가곡5호이수자가 됐다.
어떻게 살면 효부상을 받는가?
혼인하면서 바로 시아버지를 모시고 20년 살았다. 시아버지 별세하고 1년 뒤 친정어머니 모시게 됐다. 그렇게 4년 뒤 친정어머니 돌아가셨다. 딸이, 어느 날에는 “할아버지가 엄마를 좋아하니까 외할머니 올 줄 알고 먼저 돌아가셨나보다”라고 하더라. 내 딸이지만 그렇게 얘기해주니 참 고맙더라. 친정어머니 모실 때, 서울에서 학교 다니던 딸이 외할머니 보러 한 달에 한 번씩 왔다. 잘 지냈다. 그러다 친정어머니 별세하고 1년 뒤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때가 왔다. 그 때 시누이 셋이 “언니 고생했으니 엄마는 우리가 맡겠다.”고 하더라. 그래도 나는 ‘딸은 딸, 시어머니 봉양은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해서 막상 시누이가 시어머니 모시겠다고 하니 도리어 서운했다. 그러나 딸도 자식이니 그러자고 했다. “딸네는 건강할 때 가고 나중에 아프면 저한테 오시라.”고 하면서 시어머니를 보내드렸다. 그렇게 3년을 딸네에서 재미나게 지내셨는데 지난해 시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중환자가 됐다. 병원에서 재활병원으로 간 시어머니는 재활치료도 못 받고 혼수상태가 됐다. 결국 우리 집으로 모셨다. 혼수상태와 회복기를 오가던 시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지역에서 하던 봉사는 다 접었다. 오로지 시어머니 간병에만 집중했다. 시어머니를 보낼 때 보내더라도 맑은 정신으로 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동안은 시어머니 상태가 매우 나빠 곁을 잠시도 비울 수 없었으나 몇 차례의 고비를 넘기고 이제는 많이 회복하셔서, 이렇게 내가 일 본다고 외출하면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내실 수 있으면 만큼 회복했다. 공중목욕탕 반신욕, 재활치료, 치매안심센터, 주간보호센터 등을 함께 이용하면서. 이만큼 회복할 줄 몰라서, 아침마다 고맙다. 시누이들이나 지인들은 내 골병든다고, 지금이라도 시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라고 하는데, 나는 도리어 그 말이 너무 야속하다. 어른들은 여전히 요양병원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크다. 내 부모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머니 살린다고 온힘을 다했더니 내 몸이 무너질 즈음이 되자 신기하게도 시어머니가 회복하시더라. 요즘은 내 몸 회복에도 집중하고 있다.
효부상,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참으면 될 일, 내가 맏이니까 해야 하는 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다 편해진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내 신랑과 자식들이 힘드니까. 내가 하면 다 해결된다 생각하고 살았다. 고생도 생각하기 나름이고 ‘내 복이다’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세월 지나면 다 알게 된다고 믿는다. 시부모도 부모니 자식 도리를 한 것이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있다.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요양병원이 즐비한 세태는 가슴 아프다. 아이들과 시조 공부하면서 늘 강조하는 가치가 인간이 인간에게 해야 하는 도리다. 서로에 대한 도리를 지켜야 세상이 좋아진다. 도리를 아는 인성을 길러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경쟁이 최고로 인정받는 세태에 힘을 받지 못하는 가치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가 지키고 물려줄 가치는 부모 자식 사이에 도리, 형제끼리의 도리,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도리, 친구 사이의 도리,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효부상에 대한 색안경도 벗고 그저 내 위치에서 내 부모에게 도리를 하고 살았으면 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효라는 가치가 단지 구태의연한 옛 가치가 아니라는 점을 이 기회에 강조하고 싶다.
어떤 인연으로 가곡 예인이 되었는가?
석암 정경태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한국에 시조단체가 100개였고 그 분 사후에 50개가 더 생겼다. 석암 선생님 전수조교가 국당 백학정 선생님이다. 국당 선생님에게 제자 6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나다. 시아버지 모시고 사느라 힘들었던 1995년 무렵, 국당 선생님이 대한노인회합천분회 사무실에서 시조 가르치실 때, 나도 우연히 공부를 함께 하게 됐다. 그 때는 지역 어른들이 시조를 많이 하셨다. 국당 선생님이 별세하시고 다른 선생 찾다가 대구 권일지 선생님을 만나 배웠다. 권일지 선생님도 지난해에 별세하셨다. 권일지 선생님은 정경태 선생님 제자 가운데 한 분이다.
18년 만에 이수자가 됐다. 가곡이 어떤 매력이 있던가?
국당 선생님 소리로 처음 들었는데 뭔가 막, 가슴에서 우러나는 뭔가가 있었다. 그 소리가 매우 매력 있었다. 나도 초기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노랫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가락도 지루하니 수업시간 때 졸고 있던 학생이었는데 그런 때가 오더라. 뭔가 깨달음을 얻듯, 알고 나니 다른 데 한눈 팔지 않고 한 길을 걸어왔다. 열심히 배우고 내가 배운 것을 나누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국당 선생님 별세하고 나니 선생님 그늘과 가르침이 얼마나 귀하고 귀했는지도 절절하게 느끼고 그리게 됐고. 합천초등학교 아이들(합천남명정가단)과 함께 공부한 시조창으로 국악대회 나간 일, 기억에 남는다. 내 아이들이 합천초등학교를 다녀서 그 학교 3~6학년 대상 국악수업을 3년 하고 강양향교에서 겨울방학 특강 수업도 했는데, 그 또한 보람을 느끼는 일이다. 국악 가운데에서도 시조창은 어른이나 아이에게 다 쉬운 영역은 아니다. 그럼에도 자라는 아이들에게 시조창을 가깝게, 즐기는 시간을 줄 수 있었다는 점은 좋았다. 시어머니 간병을 해야 해서 예전처럼 왕성한 외부활동은 못하지만 요즘도 초등 3명과 학부모 1명, 다문화정가단이 함께 시조창 공부를 하고 있다.
최근 합천에서 1회 합천전국정가경창대회가 열렸다.
참가율이 높아 놀랐다.
예전에 합천에서 하던 전국정가경창대회가 지역주체들이 줄어드니 사라졌다가 올해 합천시조협회가 다시 하게 됐다. 합천시조 발전을 위해서는 다시 전국대회를 하게 된 일은 잘한 일이다. 다만, 그동안 정통 스승을 모시고 대를 이어 열심히 시조창을 공부해 자격을 얻고 예인 활동을 해온 나를 무시한 점은 서운하다.
10년 뒤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으면 좋을까?
이만큼 사는 것에 감사하며 산다. 늘 눈 뜨면 감사하다. 내 욕심만 조금 줄이면 어디서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살 때 어느 스님의 설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스님 말씀이, 주먹을 움켜쥐면 하나지만, 그 주목을 펴면 다섯이지 않은가, 세상이치가 내 것을 꽉 움켜쥐기만 하면 영원히 하나뿐이나 내 것을 다 놓으면 다섯이나 된다고 하셨다. 평생 그 설법을 가슴에 두고 나누고 더불어 살려고 했다. 인연이 있다면 10년 뒤에는 제자들이 만든 무대에 초대되어 한 곡 하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더 열심히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