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유산 사육신] 창간호(19.11.27)를 보면서 (1) – 하재효 논설위원
사육신지(死六臣誌) 창간을 축하하며
사육신순의 (死六臣殉義) 563주년을 맞이하여 창간되는 사육신지에 대하여 하문(河門)의 종인(宗人) 모두는 축하드리는 바이다.
진주의 진양하씨 문중에서 태어난 선비 하담(河澹)은 선산 영봉리의 유면(兪勉)의 따님과 혼인하여 처가에 머물면서 네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두게 된다.
아버지 하담과 아들 강지(綱地), 위지(緯地), 기지(紀地)가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고 막내 소지도 생원시(生員試)까지 합격했다. 둘째 위지는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 동복현감(同福縣監), 부제학(副提學),예조참의(禮曹參議) 등의 벼슬을 두루 거쳤으나, 세종과 문종이 세상을 뜬 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모습을 드러내자 당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그만두고 선산(善山)으로 낙향(落鄕)하였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단계(丹溪 =하위지의 호)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임명되자 부득이 부임하였으나 “세조로부터 받은 물건은 모조리 쌓아두었다.”고 하며 이듬해 성삼문(成三問) 등과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선산에 살고있던 호(琥)와 박(珀) 두 아들도 처형당했으며 다른 형제들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였다. 다행히 강지의 아들 하분(河汾), 기지의 아들 하포(河浦)와 하귀동(河龜同)은 16세가 되지않아 화를 면하여 하귀동은 하원(河源)으로 이름을 바꾸어 하위지의 양자로 대를 이었다. 하위지는 1758년 영조 34년에 신원이 복원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 =정2품)로 추증되었으며 충렬(忠烈)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그는 집현전 교리로 왕의 시정을 보필하고 그가 작성한 세종의 권농교문(勸農敎文)에서는 해박한 역대 선인의 농정관(農政觀)을 피력하면서 천시(天時),지리(地利),인사(人事) 등 조선조 농정의 3대 요소를 확립하였으머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편찬한 역대병요(歷代兵要)가 유명하다.
부귀와 영화를 물리치시고 효당갈력충즉진명(孝當竭力忠則盡命)을 몸소 실천한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선생을 우러러 보면서 사육신지(死六臣誌)의 무궁한 발전을 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