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읽는 동화| 하얀 지우개 – 소민호 동화작가
“아-, 지울 수만 있으면 모두 지우고 싶다.”
소년은 별마을 마당에 있는 큰 느티나무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하늘엔 온통 별이다. 반짝이거나 가물거리며 서로 어우러져 까만 하늘을 수놓았다.
“얘야, 들어가자.”
원장님이 나와서 소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부드럽고 포근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엄마의 손길과는 사뭇 달랐다. “네 아버지가 아직 못 오시는 걸 보니 일이 잘 안 되나 보다.”, “예? 네…….” 가슴에 묻어둔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움찔 하던 소년은 이내 고개를 숙였다.
“휴-, 이럴 땐 시간이 멈춰 버리면 좋겠다.” 원장님이 내뿜는 긴 한숨 속엔 5년 전의 아픈 기억이 배어 있다. “원장님은 어머니 같은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얘도 자식처럼 돌봐 주시리라 믿고 갑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어머니만큼이야 하겠습니까마는 내 자식이라 여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꼭 데리러 오겠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돌아섰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도 소년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의 얼굴에는 점점 웃음이 사라졌다. 스스로 해야 할 일도 잘 하지 않고, 일기도 잘 쓰지 않았다. 꼭 써야 하는 일기는 썼다가 모두 지워 버렸다. 그 바람에 선생님께 꾸중도 많이 들었다. “무엇이든 다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있으면 좋겠다!” 소년은 느티나무에 등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그런 지우개가 있어도 쓸 수 없을 걸!” 하얀 옷을 입은 아저씨가 불쑥 나타났다. 어둠 속이라 얼굴은 또렷이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가 잔잔하게 몸을 감쌌다. “왜, 왜 쓸 수 없어요?”, “세상을 다 지워버리면 너도 없어질 텐데! 그리고 말이야, 사람은 누구나 아픈 기억과 좋은 기억을 두루 갖고 있어. 그런 게 없으면 좋고 싫은 걸 모르잖아.”, “차라리 좋고 싫은 걸 모르면 좋겠어요.” 소년이 힘주어 말하자 아저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지우개가 있긴 한데……!” 아저씨가 소년의 눈치를 보았다. “정말 그런 지우개가 있어요? 있으면 옛날 기억들을 모조리 지우고 싶어요!”, “네 마음이 정 그렇다면 지우개를 하나 주지!”
아저씨가 지우개를 내밀었다. 유난히 하얀 지우개였다. “이건 보통 지우개잖아요.”, “허허, 그 지우개로 네가 지우고 싶은 걸 떠올리면서 눈을 감고 흔들어 봐. 그러면 깨끗이 지워지지. 하지만 한 번 지운 기억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러니 잘 생각해서……!”
아저씨는 말끝을 흐리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어, 이상하다!’ 소년이 눈을 비비며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음, 내가 헛것을 봤나?’ 소년이 머리를 흔들다가 딱 멈췄다. 꼭 쥔 손 안에 뭔가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아-, 이 건……!” 하얀 지우개다. 조금 전에 아저씨가 준 그 지우개다. 지우개를 들여다보던 소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 몸을 음습한 무서움 때문이었다. “좋아. 한 번 해보자!”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소년은 눈을 감고 앞에 있는 느티나무를 떠올리며 하얀 지우개를 흔들었다. “앗!” 머릿속에 사진기 불빛 같은 빛이 번쩍 했다.
소년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어, 이상하다. 이건 처음 보는 나무잖아!” 큰 느티나무, 늘 등을 기대고 먼 하늘을 쳐다보던 그 느티나무가 소년에게는 낯설었다. 소년은 놀란 눈으로 손에 쥐고 있는 지우개를 들여다보았다. ‘맞다. 이 지우개 때문이야!’ 소년의 손이 달달 떨렸다.
다음 날이었다. 학교에 간 소년은 아이들이 복닥대는 교실을 보자 싸웠던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소년은 그 얼굴을 떠올리며 지우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친구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어떻게 싸웠는지, 누가 이겼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소년은 그 때부터 나쁜 기억들, 마음이 아픈 기억들을 하얀 지우개로 지워나갔다. 그럴 때마다 소년의 마음이 가벼워졌다.
“음, 나를 버린 아빠와 엄마는 정말 생각하기 싫어!”
소년은 하얀 지우개를 흔들었다. 머리가 어찔하더니 머릿속이 맑아졌다. 하지만 가슴 속은 텅 빈 것 같았다. 그런 날이 거듭 될수록 소년의 눈은 희멀개졌고, 표정 없는 얼굴빛은 백 년 묵은 여우에게 홀린 사람 같았다. “얘야, 네가 요즘 좀 이상하구나!”
소년을 빤히 들여다보는 원장님 눈에 걱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제가 왜 여기 있어요? 언제부터 이곳에서 살았어요? ……?” 소년의 물음에 갑자기 원장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 이러니? 어디 아픈 건 아니냐?” 두 사람이 서로 묻고 대답을 하며 애를 쓰도 원하는 건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지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못 마땅해도 지우개를 흔들었다. 마음 아팠던 일, 미운 사람, 보기 싫은 것들은 물론 어렴풋이 떠오르는 안 좋은 기억들까지 싹싹 지워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기억에 남은 것들은 몇 안 되었다. 고아원 식구들과 원장님. 그리고 학교 선생님과 친한 친구 몇 명뿐이었다.
햇살 좋은 어느 날 오후였다. 별마을에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잠시 뒤 원장님이 소년을 불렀다. “얘야, 이 분을 모르겠니?” 원장님이 양복차림의 남자를 가리켰다. “……?” 소년은 멀뚱멀뚱 두 사람 얼굴만 번갈아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네 아빠다. 기억이 안 나니?” 소년을 바라보는 소년의 아버지 눈에 슬픔이 가득 고여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눈만 멀뚱거렸다. “미안하다. 좀 더 일찍 왔어야 하는 걸……, 이 아빠가 잘못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누……, 누구세요?” 소년은 잡힌 손을 비틀어 빼냈다. 겁을 잔뜩 먹은 듯 뒷걸음질까지 쳤다. “얘가 며칠 전부터 옛날 일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특히 안 좋았던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합니다. 의사 선생님도 이상이 없다고 하니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장님과 소년의 아버지는 한나절 동안 소년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땀을 흘렸다. 하지만 소년의 머리엔 즐겁고 기쁜 일들이 깍두기처럼 토막 난 채 떠오를 뿐이었다. 그래서 왜 즐거운지, 왜 기분이 좋은 지도 몰랐다.
“기억을 더듬어 봐라. 아무리 그래도 아빠를 어떻게 잊어!” 실낱같은 기억의 끈이라도 찾으려는 듯 소년의 아버지 목소리가 허우적거렸다. “아이의 기억이 되살아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다시 연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원장님, 미안합니다. 그러면……!” 어둑어둑 산그늘이 내려앉을 때 까지 소년을 붙들고 발버둥을 치던 소년의 아버지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원장님, 제게 아버지가 정말 있었습니까?” 소년의 희멀건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럼, 바로 저 분이 네 아버지야. 가느다란 기억의 끈이라도 놓치지 말고 잘 찾아봐!”, “기억의 끈. 기억의 끈……!”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온 소년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 느티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나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별들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때였다. 하얀 지우개를 준 아저씨가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이제 지우개는 필요 없을 것 같구나.”
아저씨가 손을 내밀었다.
“이거 저 주신 거 아니었어요?”
“영원히 네 것이라는 건 없어. 나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그것을 흔들어 봐.”
소년은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지우개를 흔들었다. 그 순간 눈앞에 나타난 아저씨와 하얀 지우개가 사라졌다. 소년의 기억 속에서도 하얗게 지워져버렸다.
“바람이 차다.” 언제 나왔는지 원장님이 소년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요. 제가 누구라는 것까지……!”
“음……, 쉽지는 않겠지만, 이제부터 하얀 빈자리를 채우면서 너도 찾아보자!” 원장님은 눈물을 흘리는 소년을 꼬옥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