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욱(仁旭) 최상천 탄생 1백주년에 붙여 (1) – 안병국 중앙대학교 학·석·박사(비교문학)


“다른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한편이라도 좋으니 후세에 남을 만한 뛰어난 걸작을 얻는 그것뿐이다”―최인욱, ‘월하취적도’에서
- 고향 출신 소설가
인욱 최상천
우리 고향 출신의 소설가 최인욱(崔仁旭·1920∼1972. 4. 12) 선생이 태어나신지 올해로 만 1백년을 맞는다. 선생의 본명은 상천(相天), 호는 하남(河南) 혹은 하남거사(河南居士)로 가야면 출신이다. ‘인욱’이라는 필명을 많이 쓰고 있는데, 호와 본명을 두고 그렇게 쓴 것은 유래를 알 수 없다. 혹시 자(字)나, 또 다른 호(號)일 수도 있다. 그 당시 문인들은 본명 이외 많은 필명과 호를 썼다.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해인불교전문학원 고등과를 졸업하고, 1941년 니혼대학 종교과를 중퇴하였으며, 경성전기공업학교 교사(1949), 국방부 편수관(1950),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1955) 등을 역임하였다.”
이상은 누구라도 검색이 가능한 인욱 상천 선생의 연보다. 선생이 자신의 번역서(‘고문진보’) 책자 말미에 약력으로 “경남 합천 출생. 일본대학 전문부 수업. 전직 중앙대학교·단국대학 강사. 저서로 <저류(底流)>·<화려한 욕망(欲望)>·<초적(草笛)> 등이 있다”고 쓰고 있다. 특히 선생의 『고문진보(古文眞寶)』(1964)·『사기열전(史記列傳)』(1965)·『요재지이(聊齋志異)』(1966) 등, 이 3권의 책은 중국의 귀중한 문헌인데 우리 한글로 된 첫 번역서다. 적어도 이 분야만은 그가 선구자다. 그런데 ‘사기열전’은 문학사전이나 그의 작품집 연보 어디에도 소개말이 없다.
1900년 중반 앞뒤 20여년, 우리 고향 합천을 대표할 문인으로 향파(向破, 이주홍)와 인욱 최상천을 든다.
우리는 경주출생의 문인으로는 시종 김동리와 목월 박영종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목릉시세에는 유학자로 퇴계와 율곡을 병칭한다. 정도전과 정몽주, 송시열과 윤선도, 최명길과 김상헌, 이승만과 김구… 중국도 마찬가지다. 소진과 장의, 한비와 이사, 손빈과 방연, 장개석과 모택동이 있고, 이백과 두보 등이 그런 경우다. 그들은 경쟁자임과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었고 조력자이기도 하다. 나를 닦기에 필요했던 타산의 큰 암석들이기도 했다. 하물며 나보다 나은 상대이랴. 〈맹자〉에 “힘이 비슷하여 경쟁할 적국이 없는 나라는 망한다”는 말이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다.
시인은 시인을 질투한다. 도자기 장수는 도자기 장수를, 거지는 거지를 질투한다. 그것은 희망과 소망일 수도 있고 부러움일 수도 있고, 위대한 행위로 향하는 나 정신의 날개일 수도 있다. 질투와 희망은 등가적 가치다.
질투의 대상은 경쟁자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 나를 발전시키는 자극제다. 시인 기형도가 ‘질투가 자신의 힘’이라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이 시에서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하고 노래했다. 그 질투가 그로 하여금 쏘다니는 ‘개처럼’, 무언가 지향하는 바를 향해 ‘지칠 줄 모르고’ 헤매게 했는지 모른다.
본 소 논문에 등장하는 두 분인 향파(向破, 李周洪)와 하남(인욱 최상천의 또 다른 호)이 어디에서고 간에 경쟁자였다거나 부러워했다거나 질투했다거나 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하남 인욱 상천이 향파를 마음으로 닮기를 소망했을 것이라는 유추는 충분하다. 향파가 34살의 왕성한 필력을 휘두를 때 고향 후배인 인욱 상천은 스무살의 약관이었다. 향파가 23세 때 그는 단편 〈가난과 사랑〉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물론 4년 전에 동화 한 편을 ‘신소년’에 발표한 이력이 있다. 인욱 상천이 ‘조광’을 통해 〈월하취적도〉를 발표할 그 때에 향파는 ‘조선문학’에 〈조춘(早春)〉과 〈제과공장〉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팔력을 자랑했다. 그때 인욱 상천은 9세였으니 거론할 일은 못된다.
인욱 상천이 향파닮기를 ‘소망했을 수 있다’는 가설이 성립한다면, 20대 가까운 나이로 성장한 인욱 상천의 심리 저변엔 반드시 질투가 수반되었을 것이다. 질투가 가진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다. 인욱 상천의 속마음을 살아 있는 우리들 마음에 이입시킨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질투는 항상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된다. 항우가 회계산을 유람하고 절강을 건너는 진시황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하겠다”고 하였으며, 유비는 어릴 적에 동리 안의 뽕나무 밑에서 놀다가 “나는 이담에 황제가 되어 이 뽕나무와 같은 덮개 있는 수레를 타겠다”고 했다. 큰 포부가 큰 사람을 만든다. 하늘을 겨냥하고 쏘는 화살이 나무 끝을 겨눈 화살보다 높이 나는 법이다.
향파를 거론할라치면 인욱 상천도 이야기하여야 옳다. 그런데, 한 분은 그 후일이 너무 소소하다는 것이다. 문학적 업적도 ―필자가 보기에는 누가 우하고 누가 열한지 구별지을 수 없다. 고향에서의 두 분 대접은 너무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향파와 인욱 상천의 나이 차는 14세에 불과하다. 많은 차이일 것같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는 나이 차다. 그런데 한 분은 문학상이 있고 기념관까지 있다. 그러나 큰 범위인 군은 고사하고 면 단위의 내로라하는 분에게 문의해도 인욱 상천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없다. 엄혹한 일제 강점 시절에 이렇고저렇고 한 이유로 애국운동의 자취가 인멸된 경우는 없지는 않았다.
여러 차례 서울에 거주하는 그곳 출신 향우들 중, 사회적인 명망가나 유명해진 인사들과, 같은 성받이인 유력한 기업가에 이르기까지 인욱 상천을 문의해 보았다. 그러나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같은 공적을 남겼으면서도 드러난 이가 있는가 하면 이름자조차 물을 길이 없는 선열이 물론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살아생전은 그렇다치고 사후까지 그렇다 한다면― 후자에게 유감이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향파의 문학적 업적이 적다는 것이 아니다. 형평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노 나라 공자 당년의 왕태(王駘)와 같은 불운을 겪고 있다고 할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