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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유산 사육신> 창간호를 보면서 (2) 하재효 논설위원

1977년에 서울시가 사육신묘역을 성역화 하면서 하위지.유성원.김문기 선생의 가묘를 추가로 봉안했다.
김문기 선생의 묘를 추가한 경위는 서울시의 조회에 의하여 1977년 9월 22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6월 병오일조에 의거하여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여섯분이 세조때 가려진 육신임을 판정하였다.
서울시장의 추가 조회로 김문기 선생의 가묘를 사육신 묘역에 모시고, 유응부 장군의 묘는 그대로 두고 뫼시라고 결의함으로써 일곱분의 묘가 모셔진 것이다.
〔성삼문 선생〕
자는 근보,눌웅 호는 매죽헌,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1438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447년 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경연관제학.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집현전 학사로서 글씨를 잘 썼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한글창제 시에 공로가 컸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니 성삼문은 공방승지로서 국새를 안고 통곡하였으며, 1456년 좌부승지로 단종복위 모의를 주도하였다.
〔박팽년 선생〕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시호는 충정이고 본관은 순천이다. 대제학과 형조판서를 역임한 박중림 선생의 아들로 충남 아산 고도(신창)에서 출생하였다. 1434년 문과에 급제 1477년 중시에 급제하고 집현전학사가 되어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참가하였으며 집현전학사들 중 모범이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집의를 역임하였고 집현전제학 충정감사 예문관제학 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김문기 선생과 족친간이고 가장 가깝게 지냈으며 박팽년 성삼문 선생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배반자의 밀고로 발각된 후 모진 고문으로 옥사하였다.시신은 사지를 찟기는 참혹한 형을 받았다. 그 후 아버지 형 등 일곱 분이 한꺼번에 처형되었다. 충청감사로 있었을 때 세조에게 올리는 장계에는 신자를 쓰지않고 신자를 쓸 위치에 거자를 썼다. 1691년에 신원(복권)되었으며 그 후 이조판서를 증직받았다.
묘는 사육신공원 묘역 우측으로부터 두 번째이고 비석에 ‘박씨지묘’라고 쓰여있다. (계속)

참고자료: 민족의 유산 사육신 제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