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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욱(仁旭) 최상천 탄생 1백주년에 붙여 (2) – 안병국 중앙대학교 학·석·박사(비교문학)

〈장자〉가 우언(寓言)으로 되어 있기에 믿을 수 없다하더라도 어느 시대이건 정반합은 있어 왔고, 작용과 반작용도 엄연히 상존해 왔다. 왕태는 절름발이〔올자·兀者〕다. 나라에서 벌을 받아 한쪽 발이 잘려나갔다. 그런데도 그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이 공자의 제자보다 많아 노 나라 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런 왕태를 공자도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고 했다. 공자는 “나도 장차 온 천하 사람을 이끌고 가서 그를 따라 배울 것”라고 하였다. 그런 그였는데도 〈장자〉 이외 그 어디에도 왕태에 관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에겐 제자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안회나 증자같은 스승의 학문을 높인 제자도 없었고, 자로같은 완력자와 학단을 만들고 그것을 경영하는 자공과 같은 수완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그대로를 보고하고도 당동벌이의 시대상황에 몰년도 기록된 바 없이 사라진 황윤길의 불운이라 할까. 정사였던 그는 부사 학봉(김성일)에 비해서 명망있는 스승도 없었고 뛰어낸 제자는 물론, 서애와 같은 동문수학한 친구도 없었다.
인욱 상천은 거주한 곳이 고향과 먼 곳이었고, 누린 수가 52세에 불과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학교에 몸담긴 했지만 비전임 신분이었고, 가르친 석·박사 제자도 없었다. 문예지의 발행인·편집인이나 주간을 하며 등단시킨 후학 내지는 도제 또한 없었다.
왕태와 공자, 황윤길과 김성일과의 관계는 정반합 선상에 놓아두고 보아야 한다. 선조 이하 백관은 왜란 7년에 바른 보고가 뿌리내리지 못함을 후회하고 반성·참고하여 더 나은 ‘극복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향파와 인욱 상천도 그렇게 보아야 옳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로 삼았을 것이다. 후생가외를 생각했고, 형만한 아우가 못됨을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위에 열거한 수다한 경쟁자와 닮기를 소망하는 대상, 그 모두를 철학적 명제에 결부시킬 수 있다. 판단과 그것에 모순되는 판단, 그 두 개를 종합한 보다 높은 데에 이르는 변증법적 길목에서 조우한 그들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대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더군더나 소설 전공, 서지학 전공도 아니다. 그러면서 왜 주제넘게 다른 분야에 거들먹거리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네 분야나 잘 하지 그래”하고 비웃음을 줄 것 같다. 그래도 그것을 무릅쓰고 이 글을 쓴다.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양주동 박사가 한국의 고가(古歌)가 일본 학자에 의해 연구되자 “우리 조선에 얼마나 학자가 없으면 이렇게 민족의 자존심이 바닥이냐”하면서 전공하던 영문학을 당분간 접어두고 우리의 고가인 향가를 연구하여 〈조선고가연구〉·〈여요전주〉 등의 책을 쓰면서 그것을 지켰다. 우리 문학의 가장 오랜 유산, 더구나 우리문화 내지 사상의 원류가 되는 이 귀중한 향가의 해독이 우리의 손에 의하지 못하고 타인의 손을 빌었다는 민족적 부끄러움, 그 빼앗긴 문화유산을 결사적으로 탈환해야겠다는, 비장한 발원과 결의―그것이었다. 만약 우리에게 양주동과 같은 경쟁의 학자, 질투의 학자, 발분의 학자가 없었다면 우리의 ‘고가연구’는 얼마나 쓸쓸했을까를 생각한다. 서양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니체에게 그의 누이동생 에리자베트가 없었고, 카프카에게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가 없었다면 세계의 문학이 얼마나 삭막했을까를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 고향에서도 인욱 상천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져야만이 합천이라는 지방문학이 살 것이고, 그것이 종래는 중앙문단에도 알려지는 파급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감히 향가를 지키고 두 소설가를 세상에 알린 저 외국의 ‘여동생’과 ‘친구’를 닮고 싶다는, 위의 3 사람과 같은 소망을 가지면서 인욱 상천이 삼불후 중 ‘입언(立言)한 것’에 반응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 의해 세워진 그의 말과 글에는 우리 고향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메시지가 있다. 좋은 작품을 남기기 위해 불철주야로 명까지를 재촉한 치열함이 있다. 썩지 않는 혼이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고 사숙한 후학이 반응하는 헌사이자 인간 인욱 상천의 문학을 이해하고 선양하는 단초가 되기를 기원하는 뜻까지를 담는다. 소설이나 시, 아동문학 등은 우리 고향에 전공자가 많이 계시기에 선생의 소설 작품 한두 편 외에는 언급을 자제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물인 『고문진보』·『사기열전』·『요재지이』 등 3편의 번역서를 중심으로 기술한다.

  1. 인욱 상천의 문학 세계와
    소설 두 편
    흔히 인욱 상천을 “전쟁과 죽음의 역사 속에서도 생명의 윤리와 도덕적 인간학을 부르짖은 낭만적 아이디얼리스트”로 평가 받는다. 그는 1938년 〈시들은 마음〉이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이듬해인 1939년엔 단편 〈산신령〉이 당선되었고, 같은 해 〈월하취적도〉를 ‘조광’에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2년 후인 1941년에 일본대학 종교과를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연애소설·역사소설·탐정소설·아동문학, 비평·시·수필 등 다채로운 분야를 넘나들며 다양한 장르적 변화를 시도했다. 등단한 이래 작고한 1972년까지 중·단편소설 80여 편, 장편소설 20편, 수필과 비평과 평론 20 여편 등 적지 않은 수의 작품을 남겼다.
    시인 황금찬은 ‘문단 반세기(35)― 최인욱 편’에서 “개처럼 기어가던 위대한 작가”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함의는 인욱 상천의 외유내강한 정신적 표상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그는 머리와 의식으로, 개연성만으로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발로’ 땅을 밟으면서 작품을 썼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어 황금찬은 “최인욱은 전쟁 이야기를 할 때엔 언제나 음성이 컸었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방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도 인간적인 화제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무척 정이 가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황금찬 시인의 회고는 인욱 상천의 순수하고 여린 모습과, 부드러우면서도 내면은 ‘굳은 심지’를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이미지로 그려볼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은 6·25 당해년인 1950년은 그가 국방부 편수관으로 재직하던 때였다. 그가 종군 기자단을 조직하고 맡은 업무를 통해 수수한 정보가 너무 많고 극적이었기에 그것을 전함에 있어 ‘음성이 컸다’는 지적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목소리가 크고 계산없이 술마시는 사람치고 악인은 별로 없다고들 한다. 황금찬 시인은 장수하신 분이신데, 구순이 넘은 연세에도 술을 아주 많이 드셨다 한다, 인욱 상천이 큰 소리로 말을 나눌 때 필시 둘은 취해 있었을 것이다. 황 시인은 인욱 상천보다 3년 연장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 대개가 그러한 것처럼 ‘반드시 취하기를 한정’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고향 출신의 시인 청송 김송배 사백께 황금찬 시인의 주량을 물었더니 “80세 전에는 매 식사마다 소주 1병. 90세까지는 1일 1병 정도. 90세부터는 저녁식사 때 반 병 정도였는데 운명하실때까지 그랬다”라고 답해 주었다.

2-1 『월하취적도』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월하취적도’는 지극히 조용한 묘사에 그의 특성이 있다고들 한다. 문학사전의 인욱 상천 해당항목에 보면 “제재나 내용의 짜임새가 있고, 격조가 높은 스타일을 보여 주었다”고 전제하고, “장편에서는 흔히 빠지기 쉬운 안이성이나 통속성을 지양하고 극화된 내용, 인물성격의 전형화로서 높은 주제 의식을 예리하게 드러냈다”고 씌여 있다.
백철은 ‘월하취적도’가 가진 소재의 지방색을 주목하여 “그 언어의 예증과 함께 그런 소재의 효용은 우연한 전환이 아니라 그 전 프로문학에 대한 반동과 급변하는 정세에 응변한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신동한은 이 작품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자기 운명에 순응하는 ‘소극적 인간상’을 지적하고 “그의 문학적 출발이 얼마나 조숙하였고 발군의 것이었나를 보여주는 가작”이라고 평가하였다. 1939년이면 그의 나이 19세다. 진정성이 상처받기 알맞은 나이다. 그 가운데서도 삶의 의미와 생명의 윤리를 지키며 다음 세대를 희망하는 내용의 작풍을 내용에 담은 것이다.
숨겨진 이야기로, ‘월하취적도’는 1938년 여름 ‘조선일보’ 신춘문예 응모작으로 보내왔으나 작자의 이름이 없고 주소도 분명하지 않아 당선권에서 밀려났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이듬해인 1939년 조선일보 자매지인 ‘조광’에 게재됨으로서 빛을 보게 되었다. “몇 달 뒤에 늦으나마 작자의 이름을 알게 되어 낙선작이지만 작품에 정이 가기 때문에 이 잡지에 싣는다”는 편집자의 소개 글이 실려 있다. 이런 사연을 가진 작품이 많은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신문을 통하지 못하고 잡지에 뒤늦게 실려, 읽는 사람의 마음을 무척 안타깝게 하였다.
19세는 ‘소년등과’라 할만한 나이다. 지금도 주요 신문사에서 현상모집하는 신춘문예는 전국의 문학 지망생의 열병을 앓게 하는 등용문이다. 이 관문을 통하면 자타가 그 문학적 재능을 인정한다. 그것을 전설처럼 기억하는 황금찬이 “작가 최인욱은 내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는 회상이 결코 언어의 덕쌓기만도, 수사만도 아닐 것이다. 그 말에는 지천명을 두 해 넘긴, 그 왕성한 필력을 휘두르다 타계한 이에 대한 안타까움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