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욱(仁旭) 최상천 탄생 1백주년에 붙여 (4) – 안병국 교수
그런데 우리나라에 이 ‘사기’ 번역의 엄두를 처음으로 낸 분이 인욱 상천이다. 비록 130편 가운데 열전 22편을 선별하여 옮긴 것이지만, 출판사의 상업적 논리에 의해 그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해야 하겠다. 그러나 정범진 교수보다는 27년, 김원중 교수보다는 46년 앞서, 인욱 상천은 이 작업을 한 것이다. 인욱 선생은 이 ‘사기’가 유럽 여러 나라에 번역 소개되고 있음을 안 모양이다. 선생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우리나라에 아직 중국의 뛰어난 전적의 번역·출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서 “외람된 생각이 없지 않다”고 겸양하고, 원작이 워낙 명저이기 때문에 자기 ‘신명’에 취해서 우리말로 옮겼다고 하였다.
물론 단권으로 만들어져야 할 것이었는데 원고 매수와 출판상의 제약이 있어 전문을 다 수록하지 않다고 양해를 구했다. 출판사의 사정만 허락했다면 열전 22편 이외에도 나머지 58편의 ‘열전’, 나아가 ‘사기’ 130편, 52만 6천 500자의 글 모두가 번역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시도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날지 못하는 해양성의 어떤 새 한 마리가 처음으로 찬 바다에 뛰어든 경우다. 우리는 ‘사기’ 번역의 불모지에 선생의 첫 시도를 기려야 한다. 지금은 몇 분의 번역가에 의해 그 효과까지를 가져왔다. 인욱 상천이 세상을 떠난 이후 반백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 와서 번역에 망설이던 번역자와 출판사가 다투어 거기에 뛰어들게 된 효과를 준 것이다.
사마천이 익주자사 임안에게 보낸 ‘보임안서(‘報任安書’)’를 인욱 상천이 왜 번역서 ‘해제’에 옮겼을까. 혹시 선생 당신의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사마천의 글은 거세형이라는 죽음보다 못한 치욕을 당하면서 그래도 구차하게 사는 것은 그가 쓴 ‘글이 후세에 남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3-3 『요재지이』
선생의 번역작 ‘요재지이’는 공자께서도 언급을 꺼렸던 이른바 ‘괴력난신’이 주된 내용의 책이다. 당 나라 시대의 전기(傳奇) 수법으로 씌여진 중국 문언단편 소설의 최고봉에 오른 작품이다. 중국의 ‘팔대기서’의 하나로 일컬어지며 원작자는 포송령(蒲松齡)이다. ‘요재’는 포송령의 호이자 그의 서재 이름이다. 작자는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하게 되자 비분·낙심한 끝에 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발분’으로 이 노작이 생산되게 된 것이다. 445편의 이야기는 중국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과연 ‘침전된 문화재’라 할만한 내용이다. 노신은 그의 저서 ‘중국소설사략’에서 ‘묘사가 자세하고 서술의 순서가 정연’한 것을 높이 샀다. 이 작품을 영역한 이는 “풍부한 인유, 화려한 행문(行文), 그것은 오직 카알라일의 필치에나 겨눌 수 있다고 인욱 상천은 이 번역서 ‘역자의 말’에 옮겨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번역본이 1966년, 바로 인욱 상천의 번역본이다. 500여 편―정확히 말하자면 445편―의 이야기를 전 3권으로 옮긴 ‘을유문화사’ 판본이다.
영화 ‘천녀유혼(倩女幽魂)’의 이야기가 실려있는 책이기도 하다. 인욱 선생은 번역본에서 ‘이상한 가죽 부대’라는 우리 글 제목에 괄호를 열고 ‘섭소천(聶小倩)’이라는 본래 제목의 글을 병기하였다. 참고로 ‘김혜경 옮김’의 ‘요재지이’에는 한문으로 ‘聶小倩’이라 제목을 달고, 줄을 바꾸어 한글로 ‘섭소천 ―천녀유혼’이라 하였다(1권, pp.167∼180).
인욱 상천의 ‘요재지이’ 출판 이후 40여년이 흐른 2002년, 완역본은 위에서 말한 민음사 판이다. ‘김혜경 옮김 본(총 6권, 권당 455 페이지 내외 × 6 = 2700 페이지 내외)’의 서평을 고전문학자인 고미숙과 소설가 이문열이가 썼는데, 환상문학의 바람에 편승되어 많은 판매 부수를 올렸다.
지금은 장정과 활자가 미려하고 천연색 삽화도 볼만하여 ‘김혜경 본’을 읽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옳다. 그렇지만 김혜경 번역가는 인욱 상천의 공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녀는 “약 10년에 달하는 번역과 퇴고 과정을 거쳐 출판했다”고 말한다. 우리의 상식으로 어떤 번역물치고 기존의 번역물을 참고하지 않는 경우는 단연코 없다. 그런데 김 번역가는 어디에도 인욱 상천 선생의 첫 번역서에 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참고했다든지 감사하다든지 하는 언급이 없다. 자기 아버지에 대한 감사에 앞서 인욱 상천을 우선해야 옳다. 그런데 김해경 번역가는 본문에 삽입된 화가와 출판사,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에게만 감사하다고 했을 뿐이다. “끝으로 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분은 묵묵한 가운데 당신의 이름(‘金正仁’)같은 삶을 자식에게 가르쳐 주셨다”라고만 썼다(김혜경, 『요재지이』 제 1권, 민음사, P.466, ‘옮기고 나서’) 인간적 도리로서도 그렇다. 옳지 않다.
- 기억해야 할 글과
버려야 할 글
우리가 무시하면 남들도 무시한다. 맹자는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를 무시한 후에 남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집안과 나라도 그렇다”고 하였다. 이른바 ‘스스로가 그렇게 취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가치를 버리고 무시하는 데 누가 그의 존재를 인정하겠는가. 그가 이렇게 푸대접을 받아도 되는가.
‘프란츠 카프카(Kafka)’라는 체코 출신의 작가가 있다.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독창적인 세계로 조명한 카프카 말이다. 그는 프루스트, 조이스와 함께 20세기 문학의 가장 중요한 개척자이자 현대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한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죽은 후 모든 작품을 ‘폐기하라’고 그의 친구에게 유언했다. 그 약속을 어긴 사람이 ‘막스 브로트(Max Brod)’라는 동향 친구다. 오늘의 카프카를 ‘카프카로 만들어 준 사람’이기도 하다. 브로트가 그의 유언대로 했더라면 카프카의 이름과 작품은 살아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 달라’고 했을까, 자기 문학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벌어진 항의라 할 수 있다. 고전적 소설의 잣대로는 이해가 어려웠기 때문이고, 그 이해를 독자에게 요구할 수도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로트는 유언과는 반대의 길을 밟았고, 그로 인해 카프카의 이름과 작품이 남아 사후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오히려 그가 생전에는 카프카보다 훨씬 더 유명한 작가였는데도 말이다.
우리 조선 왕조 성종 중종 때의 문신으로 ‘남곤(南袞)’이란 이가 있다. 유학자, 정치인,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심정, 홍경주와 함께 ‘기묘삼흉’으로 불렸던 그다. 5백년이 훨씬 넘은 오늘에 와서도 그 멍에를 벗지 못하고 있는 그였지만 당시 사장파의 거두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일찌기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므로 사대부 간에 이름이 높았다”고 하였고, “옛날로부터 재주와 행실이 겸비한 사람은 많지 못하다. 그러나 남곤의 글 솜씨만은 버릴 수 없었다”라고도 하였다.
개혁을 주장하는 조광조 등, 신진사림들을 숙청한 그 방법이 너무 교활했기에 희대의 파렴치한 놈·역적으로 그는 조선왕조 내내 소인으로 매도되었다. 그가 권력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 동원한 권모술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선조는 ‘주초위왕’이 얼마나 간교한 부추김이냐고 말하면서 “남곤의 죄가 크므로 반드시 삭탈관직하여 사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라”고 답했다. 그는 1558년(명종 13년)에 이어, 선조 원년(1568)에 다시 관작을 추삭당했다. 이황과 송순 등이 주청한 간적(奸賊)이란 프레임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홍만종은 “남곤은 문장이 매우 아름다워 동방에서 드물다”고 했다. 특히 허균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남곤의 글재주를 기렸다. “중국 명 나라 10대가에 비겨도 부족함이 없음은 물론, 중국에서 ‘팔을 휘두르고 뽐낼 수 없음이 안타깝다’”고 했고, 또 “비록 남곤의 화가 나서 침을 뱉을 사람이나, 시만은 절로 아름답다”고도 했다. 또, 다른 책에서는 그의 둘째형인 허봉의 말이라면서 “국초 이래 문은 경렴당(景濂堂, 김종직)을 제일로 치고, 지정(止亭, 남곤)을 다음으로 친다… 기묘사화 때 ‘간인(奸人)의 괴수이다’”라고 부연하였다. ‘괴수’라는 극단의 용어로 폄하하는 와중에도 그의 글 재주만은 부정하지 않았다.
밀양 출신이지만, 밀양 사람들은 그가 자기 고향 사람이라는 것에 대단히 민망해 하고 있다. 당대에 으뜸가는 문사(文士)로, 또 영남학파 종장인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인 그임에랴. 밀양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을 지냈고, “한 시대를 경영했던 인물”이 매도되고 역사의 그늘 속에 묻혀버렸다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엄정한 것이다.
그는 기묘사화의 원흉이라는 오명과 만년의 실수를 자책하고 지어놓은 자신의 글에 대해 “내가 헛된 명성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그에겐 ‘서자’와 ‘외손’뿐이라 한다)은 부디 내 글을 전파시키지 말라. …내 글을 불태워라. 나는 후대에 글을 남길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평생을 두고 쓴 원고를 마당에 쌓아놓고 불태워버렸다’고 하였다.
전자인 카프카는 자기 작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 내지는 이해를 해주지 않는 독자들에 대한 항의요, 후자인 남곤은 자신의 죄업으로 인한 부끄러움과 후회다. 자기 작품이 후인의 기억 속에 실존하기를 바라는 이가 많다. 그것이 인간 상정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