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욱(仁旭) 최상천 탄생 1백주년에 붙여 (5) – 안병국 교 수
니체(Nietzsche)는 글은 글이되 ‘피로 쓴 것’만이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글로 쓴 모든 것 중에서, 나는 오직 저자가 그의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정신임을 체험할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는 “… 피와 잠언으로 쓰는 자는, 읽혀지기를 원하지 않고 외워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스스로 경구라고 강조하고 쓴 글치고 ‘아무 의미도 없는 글’이 얼마나 많은가. 니체의 글은 신을 마주하고 죽음과 마주하고, 모든 미덕과 악덕과, 그리고 근친상간의 오해까지를 받은 밑바닥을 경험한 인간이 쓴 글이다. 진행성 뇌마비의 발병에 의한 정신착란―그런 경험으로 쓴 글이기에 경구로서의 가치가 있다. 심연을 다녀와서 쓴, 이른바 ‘피로 쓴’ 글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인욱 상천의 글은 그러하다. 타계 3년 전까지 밤낮을 다투어 가며 장편 〈태조왕건〉을 쓰고, 〈자규야 알라마는〉을 대한일보 연재에 매달렸다 한다. 불치라 할 수 있는 위궤양의 고통을 이겨가며. 주자가 ‘대학’을 죽기 3일전까지 퇴고했다는 거와 다르지 않다. 그렇게 치열한 작가 의식으로 글을 쓴 이가 자기 분신인 작품이 독자들 기억 속에 관심없기를 바랐을까. 그는 죽어서도 무위(無爲)와 벗하고 인간사에 관심을 거둘려고 했을까.
얼마 전 T. V 프로에서 김모 작가는 “젊을 때 꿈은 밥 먹는 것이었다. 나를 표현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의도된 삶은 아니었다”, “이 나라의 소설가로 기억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미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누가 내 작품을 읽든 말든 ‘관심’이 없다. 그러나 소설 3편은 온 힘을 다하여 쓰고 갈려고 한다―E.B.S, 2020, 2월 ‘발견의 기쁨, 동네 책방’”고 정직하지 않는 말을 했다. 그는 신문사에서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한 후 불혹이 넘은 나이에서 등단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있는 2 개의 상을 받았다. 하나는 ‘동인문학상’, 하나는 ‘이상문학상’이다. 흔히 그를 산문 미학의 진경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긴 하다.
상관은 임의대로 못하지만 ‘관심(interest)’까지는 없을 수 없다. ‘상관(相關, correlaion)’은 상대와의 관련을 전제하기 때문에 내 의지밖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관심(關心, interest)’은 어떤 것에 마음을 쓰거나 주의를 기울이는, 지극히 나 개인의 일이다. 그것은 주의력이나 흥미가 특정한 사물로 향하고 있을 때의 심적 태도 내지는 감정이기 때문에 의식의 본질, 즉 나의 지향성과 관련을 맺는다. 따라서 인간은 타인에게 대해서는 항상 ‘신경’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면서 사는 존재인 ‘관심인’이다. 이것이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재방식이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허언이다. 그의 생업수단이 글쓰는 일인데, 과연 그 말이 그 진심의 표현이었을까. 희곡에서 말하는 ‘레제드라마(Lesedrama)’는 상연을 못하면 읽기라도 해달라고 쓴 희곡이다. “읽는 것만으로도 좋으니 ‘읽어’주기만 해다오”라는 애절한 독백이 배어있다. 연극성보다는 ‘문학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말은 이 분야 작가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위로하기 위한 ‘립서비스(lip service) 용 용어다.
사마천의 ‘장지명산(藏之名山)’은 “제대로 평가된 평가를 위해 깊이 감춰 두고 기다린다”는 자의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글쟁이의 원망과 한이 밴 절규다. 송정희가 그의 번역본 ‘고문진보’ 머리말에서 왕희지의 ‘난정기’를 인용한 것도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내용 중 “후세 사람들이 오늘 우리들이 쓴 글을 읽고 감회를 일으키는 것은, 지금의 우리가 옛 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읽고서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그 아니 슬프랴!”라고 하고, 이 말이 바로 “오늘의 우리같은 사람을 일깨우기 위함의 말이 아니겠는가”라 하였다.
사마천에 의해 처음으로 씌여진 ‘장지명산’ 용어는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하였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촌락·도시에 유통되게 한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비록 만 번이나 주륙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없다”고 했다. “정본을 명산에 감춰 두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 후세 성인군자들의 열람을 기다린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오랫동안 왕실과 역사가들에게 외면 받은 채 1천 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사기’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당 나라 때에 와서다.
- 결론에 붙여
희망·경쟁·소망·질투는 음만 다르지 같은 뜻의 말이다.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그것들은 나의 투지를 불태워주고 나의 정열에 부채질을 해주는 것이다. 공자 사후 자기의 희망이 드러낸 책이 〈춘추〉다.
그는 “자기를 알아주는 것도, 벌주는 것도 ‘춘추’”라 하였다. 〈시경〉을 두고는 맺힌 것이 통하지 못한데에 대한 ‘발분’이라고 하였다. 사마천이 임안(任安)에게 말한 ‘구차하게 산 이유’일 수도 있고, 한유의 ‘송맹동야서’에서 세상이 고르지 못한 데에 대한, 맹교를 위해 ‘대신하여 운 울음’일 수도 있다.
김부식은 우리의 중요한 사서 ‘삼국사기’ 서문에서 “비록 명산에 비장할 것은 못되더라도 간장 뚜껑 마개로 쓰게 되지않기를 바란다”고 썼다. 이 말도 김부식이 자신의 마음을 사마천에 빗댄 표현일 것이다. 임금에게 바친 글이라고 하지만 그속에 자신의 마음을 가탁한 것이다.
인욱 상천의 속마음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것을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월하취적도〉의 주인공인 정주(貞柱)를 통해 시사받을 수 있다. 그의 마음을 전지적 시점으로 이렇게 썼다.
“정주가 이곳으로 온 후부터 그의 가슴엔 알 수 없는 희열이 용솟음치고 마음이 기쁘고 보니 그런지 살과 기운이 날로 더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정이 허락할 수 있는 데까지 정주는 이곳을 떠나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다.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결혼도 하지 말고 이렇게 살면서 힘껏 독서하고 창작하는 것이 정주의 둘도 없는 희망이었다. 정주에게 이 위에 또 다른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한편이라도 좋으니 후세에 남을 만한 뛰어난 걸작을 얻는 그것뿐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정주는 아직 문학밖에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겨본 적이 없었다. 자기에게서 문학이 떠나는 날, 그날부터 자기의 존재는 사멸(死滅)인 줄로 알고 있다. 이만큼 그는 문학에 애착을 느끼는 인간이었다(‘밑줄’은 안용자 임의로).”
우리가 인욱 상천을 소홀히 하면 다른 사람도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인욱 상천에 대한 평가와 회상은 우리 고향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한국문학사의 가치와 정리·보존에도 관계된다. 즉 우리 한국문학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어떤 특정인을 두고 과장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너무 무시하는 것은 더 더욱 좋은 것이 아니다.
당 나라에 ‘귀재(鬼才)’라 불리운 ‘이하(李賀)’라는 시인이 있었다. 중국문학사에 특이한 기원을 이룩하고 27세로 요절하였다. 그는 ‘추래(秋來)’라는 시에서 “푸른 죽간(竹簡)에 쓴 나의 시를 읽어서, 좀먹지 않게 해줄 이 누구인가? 가을날 무덤 속에서 귀신이 되어 포조(鮑照)의 시를 읊조리면, 한 맺힌 나의 피는 천 년 내내 땅속에서 푸르리라(誰看靑簡一編書. 不遣花蟲粉空蠹, … 秋墳鬼唱鮑家詩, 恨血千年土中碧)”고 유언처럼 읊고 죽었다. 자신의 원통한 죽음을 풀길이 없어 위와 같이 절규하고 말이다. 포가(鮑家, 포조)도 이하처럼 역시 회재불우― 어쩌면 이하 못지않게 불우한 일생을 마친 시인이다. 주 나라의 장홍(萇弘)이 충성을 다했지만 원통하게 죽어 그 피가 그의 사후 푸른 옥으로 변했다는 고사를 이하는 차용한 것이다. 어쩐지 음산하여 억울한 귀신의 하소연을 듣는 것 같지 않은가.
종이가 있기 전에는 중국에서는 주로 흰 비단이나 죽간에다가 글을 썼다. 그러나 비단은 값이 비싸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가난한 문사 이하는 비단은 고사하고 대쪽 구하기도 여의치 않아 아직 건조가 덜된 생날대쪽인 ‘푸른 대쪽〔靑簡〕’에다 시를 옮겼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쓴 시가 천년 후에는 벽옥(碧玉)으로 변해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그렇다. 인욱 상천도 이하처럼 자신의 ‘피로 쓴 글’은 원한이 되어 천년을 두고도 푸르고 있을 것이니 “기억해 달라”고 우리 고향 사람들에게 말하는 듯하다. 후세에 남길만하다고 썼으니, 당신이 쓴 원고가 수해와 화재를 피할 ‘명산(名山)에 저장’은 못 되더라도 ‘간장 뚜껑 마개’로는 쓰지 말기를 바란 것이다.
인간으로써 가장 불행한 것은 죽음 뒤에 자기를 기억해 주지 않는 거라 하였다. 그것은 연면하는 역사와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자 불연속적인 것이 되고 버림받은 자가 되는 것이며, 인류와의 연대를 상실하는 것이 된다.
인욱 상천은 『사기열전』과 『고문진보』, 그리고 『요재지이』를 우리 말로 처음 옮긴 분이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고 알아도 외면하고 있다. ‘사기’는 중국 25사의 머리에 두는 책이며, ‘고문진보’는 〈문선〉 수록의 글보다 더 엄선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요재지이’는 8대기서의 하나이다. 그의 글을 ‘암송’까지는 과하지만 그분 존성대명-명자(名字) 3자만이라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올해가 인욱 상천 선생 탄생 1백주년이고, 내월 4월 12일은 선생 가신지 48년이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