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짜 상록수인가 (현실을 통곡한다) – 조대제
가난한 소작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고 병약하고 시들시들해서 율곡초등학교에 11살이 되어서야 일자무식인 아버지의 손에 잡혀 입학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당시 부호이며 권세까지 가진 어느 지방의 목사벼슬까지 하신 권세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천부적인 대학자이자 선풍(仙風)도인이었다. 하지만 먼 토지는 지인에게 공짜로 다 주어버리고, 남의 자식만 가르쳐주고 자기 자식에게는 글자 한 자 가르쳐 주지 않았고, 부자집 가상(家像)이나 산세 등을 공짜로 봐주느라 명주 두루막을 펄럭이며 다니는 도사(道士)였다. 그렇게 집안을 피리 소리가 날 정도로 가난하게 만들어 놓았다.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우리 어머니는 병약하고 무능한 아버지의 뒷바라지뿐 아니라 끊이지 않는 사랑채의 손님 뒷바라지에 밤을 낮 삼아 일하셨다. 작은 체구에 다부진 어머니는 자식들만은 굶기지 않고 공부를 시키려 하셨는데 그래서 어머니의 손자들은 다 훌륭하게 잘 살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의 도사(道士) 생활로 논떼기, 밭떼기라고 두 골도 없는 소작농으로 전락해 지주들 앞에서 손바닥을 싹싹 비는 신세가 되고, 어머니가 너무 바빠서 시아버지께 들똘논에 물이 있는지 보고 오라고 하시면 논 언저리까지 가시어 “돌을 던져 보니까 물소리가 나더라”했다는 일화도 있다.
삼현육각(三絃六角)을 거꾸로 헤아리시는 바보 도사. 이걸 물려 받으신 하얀고니(白고니: 동네어른들이 우리 아버지의 별호로 부른 것)는 학교생활을 시작해서는 늘 반장이고 학교행사 때는 명배우로 주연을 맡을 정도였으니 천재였던 모양이다.
내가 셋째로 태어났을 때 도사 할아버지의 일성(一聲)이 “옜다- 우리 집에도 이제 큰 부자가 태어났다”고 좋아하셨다는 것이 훗날 우리 어머니의 전언이다. 나는 지금껏 부자가 되지 못했는데 자식복과 처복을 두고 하신 것으로 보인다. 일자무식(一字無識)한 우리 어머니였으나 대학총장보다 더 많이 알고 몸으로 세상 모든 것을 부딪쳐 오신 우리 어머니. 지금은 어머니를 꼭 닮은 꼬맹이 막내딸 자경이가 있다. 지금은 서울 강남에서 출판업을 하고 있는데 어느날 새벽에 제 오빠의 재력을 업어 고고(呱呱)한 울음을 터뜨릴 때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나는 1986년 가을 즈음에 흙냄새와 고향이 그리워 폭포가 있는 이곳 황계리로 찾아왔다. 동네사람들에게 떠밀리어 8개월만에 싱거운 동네구장을 맡았다. 지방 명문고를 나와 서울 명문대학 문을 여러 번 두드려 보았으나 가난으로 한 번도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했었다. 한 때는 대형출판사 지사장도 지낸 바가 있었지만 외상값을 받아내지 못해 거듭된 실패로 상처만 끌어안고 돌아온 귀농이었다. 마을이장을 맡은 다음해 보리증산왕 전국우승으로 어느 마을보다 지역 5개마을 경지정리를 면내에서 제일 먼저 할 수가 있었고 이에 마을 농로포장 1km를 부상으로 받아내기도 했다.
경지정리를 하면서 하천개수를 했는데 당시 일부 몽리민의 오해로 몽둥이 타작을 당할 뻔도 했다. 시골마을 숙원사업 성격은 처음에는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해야 된다”고 해놓고, 절반쯤 성사되면 “무어 그거 안 해도 되는데”하다가 90%쯤 성사를 보이면 “나는 그거 하자고 한 적 없어”하며 핫바지 바람 새듯 다 흘러 버리고… 집행과정과 화가 난 민원으로 뺨때기 한 쪽은 내놔야 한다. 세 번 구장직을 내놓고 들어앉아 있는데 투표를 해서 또 불러내 그럭저럭 십수 년간을 했다. 창고관리까지 맡고 있어 자칫하면 박살나는 수가 있는 데도 말이다.
내 나이 62살 되는 해에 황계폭포도 살리고 3개면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황계지구 농업용수 개발사업을 함에 있어 추진위원장으로 또 선임되어 제일 첫 과제가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몽리민에게 회비를 걷어야 하는데, 강제권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순 민간단체가 3개면 600여 농가에 무슨 방법으로 할꼬, 그래서 걷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고 쌈지돈을 풀기 시작했다. 12년 동안 주체 관청이 농업진흥청, 농업기반공사, 농어촌공사 등으로 3번이나 바뀌었다.
한 번은 거창검찰청에서 출석요구서가 와 불려갔다. 1호 검사와 마주 앉아 “당신 돈을 얼마나 먹었느냐, 바른대로 말해봐” “돈을 먹다뇨, 그런거 없어요” “그러면 그 경비는 어디서 나왔으며 월급은 얼마씩 받느냐” “검사님 그러지 마십시오. 추진위원장은 순수민간단체로 월급도 없고 경비는 봉사의 마음으로 쌈지돈을 조금씩 풀다보니 한 600만원 되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추진과정에서 무슨 환경단체라면서 찾아오는 손님도 많았다. 12년 만에 460억 정도의 대사업이 완성된 지, 1년반 가량. 준공식을 가졌는지 말았는지 아직 소식이 없다.
이와중에 황계 둔덕간에 임도를 해야 한다고 아우성이 나 합천군 17개 읍면 중에서 단 2건 중 나온 것을 천신만고로 선정을 받아왔다. 처음에 하는데 주민들은 다 어디로 가고 50여 건의 지주동의서를 받으러 다닌 일이며, 공사예정지를 측량하려 답사하려니 길도 없는 산을 칡넝쿨 헤집고 다니며 면산업계 산림조합 직원들과 비지땀 꽤나 흘렸다. 그 결과 한 5년 만에 시멘트 포장까지 완성된 반질반질한 도로가 완성되었으나 이것마저도 준공식을 가졌는지 못 가졌는지 모르고, 지금은 어느 산짐승들이 한 것으로 끝나있다.
이 임도의 현실을 고발하고자 한다. 이런 산골에 매끈하고 포장길이 닦아져 있으니 제일 먼저 찾아든 것이 ‘송장들’인데 비석 상석에 거사, 처사, 학생 머리글을 달고 100여 기가 넘도록 즐비하게 엎드려 있다. 맨 위에 전망 좋은 곳에는 어느 문중 문파가 재력을 과시하는 양 10개도 더 되는 납골당을 최근 지어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