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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서번트리드십 (1) – 변명규 논설위원

우리의 유구한 역사에서 참으로 많은 인재들이 오고갔다. 그들을 일일이 나열하기란 힘들다. 그런데 그들 중에 가장 선택하고 싶은 사람을 묻는다면 누구일까? 물론 어느 한 인물에 고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선택자의 조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대에 따라, 직업에 따라, 자라온 환경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선택의 기준이 달라지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나에게 선택하라고 한다면 단연 이순신 장군을 선택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의 생애는 그야말로 파란만장의 삶이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도 의연히 대처했고, 괄시를 받고, 시기를 받고, 모함을 받으면서도 누구 하나 원망하거나 나쁜 감정을 갖지 않고 풀려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위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기 때문이다. 그의 업적은 일일이 다 기록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정도를 걸어가다
    1) 만나는 것조차 아부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하고도 그를 밀어주는 유력 인사가 없어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조판서 이율곡은 그의 사람됨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 아니라 같은 종친(덕수이씨)이므로 한번 만나보고 싶어 유성룡에게 주선을 부탁했다. 유성룡의 말을 들은 이순신은 이렇게 말했다. “종씨이기도 하고, 또 그분의 인품도 흠모하기 때문에 저도 한번 찾아 뵙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갓 벼슬길에 나선 몸이고 그분은 인사행정을 맡아 보는 이조판서이십니다. 이런 입장에서 만나는 것은 자신이 아무리 떳떳해도 남의 눈에는 아부로 보일 것입니다.”
    2) ‘오동나무’도 국가의 재산이다
    이순신이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에 만호로 부임하던 시절 이야기이다. ‘만호’라 함은 한 진의 수비를 책임지는 종 4품의 무관인데 그당시 성박은 전라좌수사로서 전라도 해안의 수비를 책임지는 이순신의 직속 상관이었다.
    그러한 전라좌수사 성박이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자신의 부하들을 보내자 이순신은 오동나무는 국가의 재산이고 이렇게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겠느냐며 오히려 성박이 보낸 군졸들을 호통쳤다. 이순신의 이런 원칙주의적인 행보로 관영 앞 뜰에 있는 오동나무는 보존될 수 있었으나 이순신은 이전 병조정랑 서익과 전라좌수사 성박의 모함으로 아예 관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파직’을 당한다. 파직을 당하고 4개월 후에 이순신은 기존 종4품 만호직에서 종 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었다.
    3) 화살통 사건​
    이순신의 활통을 병조판서의 요구에 “이까짓 화살통 하나쯤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다만 이 하찮은 물건 하나로 다같이 이름을 더럽힌다면 그 얼마나 미안한 일이겠습니까?”
    완곡하지만 엄청나게 가시가 있는 말로 병조판서의 부탁을 거절한다. 공과 사를 구분해 청탁과 아부를 철저히 금하고 오로지 자신이 맡는 임무에만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을 위의 사례들에서 절실히 느낄 수 있다
  2. 이순신 장군의 평가
    이 순신 장군을 평가한 자료는 내외 문헌에 허다하지만 그 대표적이 예를 보자.
    1)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해를 다시 손본 공로다(經天緯地之才 補川浴日之功).’
    이 글이 너무나 유명하여 예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장군을 찬양하는 문구로 인용하고 있다.
    2) 정조대왕
    정조대왕이 직접 지은 ‘어제상충정무지비’(御製尙忠旌武之碑)의 한 구절을 보자.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내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구의 비명을 짓는다 하랴.’
    3) 일본 해군 명장 ‘도고 헤이하치로(동향평팔랑,東鄕平八郞)’
    그는 러일전쟁에서 유명한 러시아 발틱함대를 멸망시켜 일본의 승리를 이끈 장군이다. 그의 승전을 축하하는 피로연 석상에서 자기를 영국의 넬슨과 조선의 이 순신에 비겨서 찬양하는 축사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를 넬슨에 비기는 것은 가하나 이 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4) 일본의 덕부저일랑(德富猪一郞)
    그는 그의 저서 ‘조선역(朝鮮役)’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순신의 죽음은 마치 넬슨의 죽음과 같다.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겼다. 조선역의 전후 7년간에 조선에는 책사, 변사, 문사의 유는 많았지만 전쟁에 있어서 참으로 단 한 사람 이 순신으로써 그 자랑을 삼지 아니치 못하리로다. 또 일본의 제장도 마침내 이 순신을 향하여 생전에 기를 펼 수 없었다. 그는 실로 조선역에 있어서 조선의 영웅일 뿐 아니라 또한 삼국을 통해서 영웅의 한 사람이었다.
    5) 일본의 해군 중장 좌등철태랑(佐藤鐵太郞)
    그는 1926년 ‘조선지방행정’(제6권 2월호)에서 ‘절세의 명장 이 순신’ 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군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력, 천재적인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 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으로 자랑으로 삼는 바.”라며 실례를 하나하나 들었다.
    해군 장관인 나로서는 평생을 두고 경모하는 바다의 장수로 서양에서 화란의 명장 ‘데 로이데르’와 조선의 이 순신 그 사람이다. 만약 두 사람 중에 갑과 을을 논하라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이 장군을 갑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영국에는 넬슨 이하 몇 사람의 명장이 있다. 넬슨이 세계적인 명장으로 명성이 높은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이지만 그 인격에 있어서나 또는 창의적이 천재에 있어서는 도저히 이 순신 장군의 짝이 될 수 없다. 프랑스의 장군 ‘스후란’, 미국의 장군 ‘아랏카트’와 같은 세계적인 명장들도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차라리 넬슨 이하의 인물이다.
    ‘데 로이데르’는 인격과 역량이나 그 경력도 어쩌면 이 장군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단 장군으로서 필요로 하는 독창적인 천재에 있어서는 한 수 꺾이는 것 같이 보인다. 이 장군은 말할 것도 없이 풍신수길의 원정군으로 하여금 목적 달성을 못하게 함과 동시에 제해권의 여하가 국방상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증명한 명장이었는데 중도에서 모함을 당하여 백의종군하였으나 장군으로서는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아니하고 그 특대를 달게 받았으니 이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장군의 인격이 오매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장군은 군에 있을 때 군기 엄숙하고 위풍이 있으며 부하를 사랑하기를 친자식과 같이 하였으며 장병을 방문하여 그들의 의견을 자주 듣고 은신을 밝게 하며 생각을 깊이 하여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매사에 정성으로 임하는 모범적인 장군이었다.
    이외에도 전 세계 해군의 역사상 이순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아니 지금도 이순신의 전략전술과 지혜를 배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3. 서번트 리드십
    요즈음 기업이나 정치에서 소통이라는 말이 많이 회자 되고 있다. 인간 사회는 어떤 목적에서든지 크고 작은 조직이 형성되어 있고, 이 조직은 수평 수직의 관계로 연결 고리가 형성되어 있다. 한데 이 조직을 어떻게 꾸려가느냐에 따라 그 조직이 발전을 할 수 있느냐 퇴보의 길로 치닫게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에 그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가 있고, 그 리더의 역할이 조직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동방순례’에 등장하는 ‘레오’는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 어딘지 사람을 끄는 데가 있고, 쉽사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어서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는 즐겁게 일했다. 대개는 혼자 노래를 부르거나 휘파람을 불었으며, 필요할 때 외에는 눈에 띄지도 않는 이상적인 하인이었다.
    순례자들을 도와 허드렛일이나 식사 준비를 했고 늘 순례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 그들이 지치지 않도록 배려했다. 온갖 잔심부름을 하고 순례자들에게 위로를 아끼지 않았던 그가 어느 날 소문 없이 사라지자, 무리 중 누구도 레오가 해오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려고 나서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 책임을 미루던 순례 일행은 갈등에 휩싸인다. 그제야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했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레오야말로 순례단을 이끈 진정한 리더였음을 깨달았다.」(「」안은 옮겨온 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