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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건국대통령 서거 55주기 이화장 추모식에 참석하고

① 이승만 대통령 추모식 현장. ② 故 이승만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 박사와 자부(子婦) 조혜자 여사 내외분과 함께 기념촬영

서거 55주기 추모식 열려

7월19일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주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故 이승만 건국대통령 서거 55주년 추모식>이 열렸다. 추도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 박사와 자부(子婦) 조혜자 여사 내외분과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 박삼득 국가보훈처장, 김문수 전 경기지사, 이언주 전 국회의원, 합천출신 송대성 전 세종연구소장(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대수장] 사무총장) 등 300여명의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추모식이 열렸다.
1부 행사는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추모 영상을 시청하고 김종인(미통당 비상대책위원장), 주호영(미통당 원내대표), 박삼득(국가보훈처장), 안보길(이승만 포럼 대표)의 추모사에 이어 배제 아펜젤러 중창단의 특별찬송과 추모의 노래, 유족 이인수 박사의 인사 말씀과 기념촬영으로 1부를 마감했다. 2부로 현충원 묘소 참배하여 헌화 및 분향으로 고인에 대한 묵념 및 조총 발사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필자는 위기의 고비마다 이승만 박사의 조국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빛나는 업적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오늘날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농지개혁법과 의무교육을 최초로 도입하였고 한미동맹을 통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그 바탕에서 오늘날 자유민주국가의 초석을 다진 건국대통령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배재학당에서 자유·평등·인권사상 정신을 심어
우남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자유, 평등, 인권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적 이념인 서양문물을 접하게 되었는데 독립협회 주관 민주공화제 혁명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5년 7개월간 감옥에서 살면서 영어공부와 성경을 통독하였다. 고종황제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루즈벨트 대통령과 면담하였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 되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5년 만에 취득하였다. 1910년 한일 합방을 맞아 귀국하여 독립운동의 길에 올랐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하와이에서 3.1운동 이후 1019년 4월 23일 전국13도 대표로 구성된 한성임시정부 입정관 총재로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Republic of korea)
1919년 9월6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입시정부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워싱턴 D. C에 구미위원부를 개설하여 미국, 유럽에 독립운동 외교활동을 총괄하였다. 당시 태평양 전쟁을 예고하는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 논문이 1941년 7월 출간되어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예고한 선지자였다. 4개월 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이승만 박사의 논문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 등 조야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가를 창조한 건국대통령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길은 험난하였다. 38선 이북에는 소련의 조종을 받는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이남에는 남로당이 집요한 공산화 투쟁이 전개되어 대구폭동사건,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등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조국으로 귀국하여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새나라 건설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이승만은 이를 반대하였고 한국문제는 UN에 이관할 것을 주장하여 유엔이 남북한 자유선거를 위한 유엔 한국위원단 파견을 결의하였으나 소련이 UN의 북한 입국을 반대하여 남북총선거는 무산되었고 유엔 소총회에서 2/3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고 자유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 정부를 세우도록 결의하였다.
1948년 5월 10일 남로당 테러로 선거를 치르지 못한 제주도 2석을 제외한 198석으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고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48년 7월 17일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이념으로 하는 제헌 헌법을 공포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 세계에 공포하였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 되었다.

세계적 성공사례 농지개혁 단행 -농노 해방 대통령
1950년 3월 1일 소작료 명목으로 산출량 50%를 3년 동안 납부 조건으로 소작농이 자작농으로 전환되는 법이 통과되어 단 3년 만에 전 농지의 95.7%가 자작농이 되었다. 이는 6.25때 인민군들이 농민들을 속여 공산주의 세상이 되면 지주들로부터 농지를 빼앗아서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겠다는 달콤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이는 이승만의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6·25 동란 미국 유학시절 정계 지인들과 통화 UN군 참전
협조 성사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이 종식된 이후 1994년 1월 김영삼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하여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된 소련의 기밀문서와 중국의 문서 등에서 6·25가 남침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가 담긴 문서가 발견되면서 6·25 전쟁의 전모가 실증적으로 드러났다. 6·25 전쟁은 북한의 김일성. 박헌영이 소련 스탈린의 허락을 받고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으며 면밀히 계획을 세우고 전격적으로 남침을 단행한 침략 행위였다. 1949년 3월 17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스탈린은 미군이 4월 30일 까지 마지막 철군을 앞두고 있어 미국 개입을 우려 처음엔 반대했으나, 1950년 1월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이 에치선 라인을 선포 미국의 새로운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나는 당신을 도울 준비가 돼있다”고 비로소 알렸다.(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Issue 5, Spring 1005.PP 8~9 )

이대통령 국군통수권자로 정일권 참모총장께 북진통일 명령
6월25일 3일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3일간 서울에서 머물다가 김일성은 8월15일까지 부산까지 쳐들어 갈 것을 명령하여 낙동강 벨트를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다. 이때 백선엽 사단장의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9월28일 서울을 수복하였으며 38도 선까지 한국군과 유엔군이 실지를 회복하였다.
9월3일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38선을 넘어가려면 UN의 허락이 필요했다. 유엔군은 38선에서 전쟁을 망설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귀하는 대한민국 국군의 통수권자인 내말을 듣고 북진하라”는 붓글씨로 써서 북진 통일 진격 명령을 내렸다. UN도 10월 7일 북진을 결의하였고 10월 8일부터 38선을 넘어 북진이 시작되었다. 북진을 이끌어낸 분은 바로 이승만 이었다.

한미 동맹으로 안보 100년 대계 구축-8억불 미국 원조 받아
군 장비 현대화

1953년 7월 12일 상호방위조약의 기초를 다졌다. 이승만은 국제법 전문가였다. 그해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자 7월 27일 판문점에서 UN, 중공 북한의 대표단이 휴전협정에 서명하였으나 이박사는 끝내 휴전을 반대하였다. 1953년 6월 이승만과 조지 워싱턴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의 선후배사인 텔라스 미 국무장관을 한국으로 불러 이승만은 휴전의 조건으로 한국군 70만 대군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군수물자 지원과 식량과 양말, 속내의 까지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1만 명의 한국군 장교 유학생을 보내서 선진화된 군사경영학을 배우게 했다. 이때 미국 유학을 다녀온 국군 장교들이 한국의 현대화를 이끌어가는 엘리트층인 인재들로 활동했으며 이때 배운 군사경영 기술이 각 기업체 경영에도 전파되었다.

의무교육과 인재육성을 위한 교육 대통령
1949년 6년제 의무교육을 도입하여 문맹퇴치를 하여 1948년 78% 문맹률을 1959년 22%로 낮추었고 해방 후 19개인 대학이 1960년대엔 63개 대학으로 늘어났다. 산업부흥으로 기술이 시장경제 발달을 초래한 경제대통령이다. 625 전쟁 중에도 부산에서 전후 복구에 필요한 국가 인재를 양성하여야 한다는 혜안으로 부산에 전시 연합대학을 설립하여 대학생들은 전쟁터로 나가기 않고 공부를 하도록 배려하였다. 이승만은 이공계에 관심이 컸으며 하와이에 있는 동지회관을 매각한 돈으로 인천에 인하대학을 설립하여 미국의 MIT 공대와 같은 기술 인재 양성에 전력하였으나 좌파들이 일제 잔재라고 하면서 인하대학교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도 철거당하여 현재 인하대학교 창고 속에 보존하고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빌면서
평화 협정이나 정전협정은 6·25 전범을 처벌한 후에나 가능하다. 독일도 뉴런 베르크에서 전범을 처벌한 사례가 있은 후였다. 전범이 누구인지 재판을 통해 밝혀야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정도인데 무조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맺어 미군을 철수 시키려는 북한의 숨은 의도를 경계해야 하다. 미국에서 국제정치외교학을 전공하여 국제관계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던 혜안과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에 기초한 자유대한민국을 수립하고 6·25 전후를 통하여 발휘한 이승만의 위대한 업적이야말로 전후 70년 동안 잿더미 속에서 경제 10위권의 국가로 번영하는 초석을 다진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일평생을 통하여 조국의 자주 독립국가를 이룩한 건국대통령으로 업적이 새롭게 조명되어 55주년 추모의 해를 맞이하여 오늘날의 발전된 대한민국이 있게 하여준 이승만 대통령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기원하면서 이글을 맺는다.
※본 논문은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http://www.syngmanrhee.or.kr 자료를 참고로 작성하였음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