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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삼가 ‘용암서원 묘정비’는 경상우도의 슬픈 자화상이다 (2) – 조찬용 남명선생선양회장

□ 용암서원 묘정비(龍巖書院 廟庭碑)​
(1673년(현종14) 좌의정 우암 송시열 지음. 1812년(순조12) 2월 8일 삼가현감 오철상 등이 비석 끝 부분에 추가로 가필한 뒤, 글을 쓰고 세움)

문정공 남명 조선생 묘정비명 병서
남명 선생이 간 뒤로 선비는 더욱 구차해지고 풍속은 더욱 야박해져, 식견 있는 이는 선생을 더욱더 그리고 있다. 그러나 사람마다 의(義)를 귀하게 여기고 이(利)를 천하게 여기어, 염퇴(恬退, 주: 명예나 이권에 뜻이 없는 것)가 가상스럽고 탐모(貪冒, 주: 명예나 이권을 탐하는 것)가 수치스럽다는 것만은 알게 됐으니, 선생의 공로는 참으로 크다.
선생은 천품이 아주 뛰어나, 난 지 3세에 위중한 병에 걸리자 대뜸 모부인(母夫人)에게, “소자(小子)가 다행히 남자로 태어난 것은 하늘이 반드시 중책을 맡기기 위해서이니, 오늘 어찌 소자가 요사(夭死)할까 걱정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했다. 겨우 15세 남짓 되었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의 참혹함을 목도하고, 그만 과거(科擧)에 뜻이 없다가 어버이의 명으로 한 차례 응시한 적이 있었으며, 문장을 구성하는 데 좌유(左柳, 주: 진(晉)의 좌사(左思)와 당(唐)의 유종원(柳宗元))를 사모하다가 하루는 주염계(周濂溪)의, “이윤(伊尹)의 뜻하던 것을 자기의 뜻으로 하고 안연(顔淵)의 배우던 것을 자기의 배움으로 해야 한다.”는 말을 읽고 나서 개연히 발분, 산재(山齋)에서 제생들과 작별하고 돌아와 날마다 육경(六經)·사서(四書)와 송(宋) 나라 제현의 글을 읽어 깊이 연구하고 힘써 탐색하기에 밤낮이 없었으며, 선성(先聖)과 주(周)·정(程)·주(朱) 세 선생의 상(像)을 손수 모사(摹寫)하여 놓고 앙모하는 뜻을 보였다.
규암(圭菴) 송 선생(宋先生, 주: 송인수)과 상국(相國) 이준경(李浚慶)이 《대학(大學)》·《심경(心經)》 등의 책을 증정하자 선생이 대뜸, “이 책들을 얻고 나니, 마치 언덕이나 산을 짊어진 듯 책임이 무거워졌다.”고 써놓고 더욱 실제(實際) 공부에 종사했다. 이 무렵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에 임하고 대윤(大尹, 주: 윤임·尹任 일파)·소윤(小尹, 주: 윤원형·尹元衡 일파)이 서로 모해(謀害)하므로 선생이 더욱 세상에 나갈 뜻이 없어 거업(擧業)을 영원히 단념한 후, 지리산에 들어가 집을 짓고 ‘산천재(山天齋)’라 편액(扁額)한 다음, 사뭇 학문에 전력하여 그 조예가 더욱 고명한 경지에 이르렀다.
일찍이 회재 선생(晦齋先生, 주: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재랑(齋郞, 주: 참봉·參奉)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에 회재가 본도(本道)의 관찰사(觀察使)로 와서 만나기를 청했으나 역시 사양했다. 명종(明宗) 3년(1548)에 초서(超敍: 남을 뛰어넘겨서 뽑아 쓰는 것)를 특명하여 두 차례나 주부(主簿)에 제수되자, 마침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조정에 있다가 글을 보내어 나오기를 권고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고, 또 단성현감(丹城縣監)으로 제수됐으나 소(疏)를 올려 사양했다.
21년(1566)에 판관(判官)으로 승직, 소명(召命)이 두 차례나 내리고 약이(藥餌)와 식물(食物)까지 하사하므로 선생이 할 수 없이 소명에 응했다. 이에 상이 인견(引見)하고 치도(治道)를 묻자, 선생이 아뢰기를, “도는 서책(書冊)에 들어 있으므로 신(臣)의 말이 새삼 필요하지 않습니다. 신은 군신(君臣) 사이에 그 정의(情義)가 교부(交孚)되어야만 치도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는, 이어 생민(生民)들의 고달픈 상황을 들어 적극 진언했다. 상(上, 주: 명종)이 학문하는 방도를 묻자, 아뢰기를, “반드시 마음으로 체득할 것이요, 한갓 남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닙니다.” 했고, 상이 또 제갈공명(諸葛孔明)에 대해 묻자, 아뢰기를, “공명이 소열제(昭烈帝)와 동사(同事)한 지 10년 동안에 한실(漢室)을 일으키지 못했으니, 신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고는, 그 이튿날 돌아와 버렸다.
선조(宣祖) 1년(1568)에도 두 차례의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이어 시폐(時弊) 열 가지를 들어 진언했며, 2년(1569)에 또 소명을 받자 글을 올려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임금의 명선(明善)·성신(誠身)에 있으니, 반드시 경(敬)을 주(主)로 삼아야 합니다.” 하고, 또 서리(胥吏)들의 정폐(情弊: 사정에 의하여 일어나는 폐단) 상황을 들어 적극 진언(陳言)했으며, 전첨(典籤, 주: 종친부·宗親府의 정4품 벼슬)에 제수됐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마침 큰 흉년이 들어 상이 곡식을 하사하자, 선생이 글을 올려 사은(謝恩)하고 이어 아뢰기를, “여러 차례 어리석은 말을 드렸으나 실현된 바가 없습니다.” 하여, 그 사의(辭義)가 매우 절직(切直)했다. 이윽고 상이 선생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급히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료하게 했으나 선생이 이미 별세했으니, 바로 융경(隆慶, 주: 명 목종(明 穆宗) 임신년(1572, 선조5)) 2월 8일이었다.
지난해 산천재(山天齋) 뒷산에 목가(木稼: 추위가 극심하여 고드름이 나무에 열리는 현상)의 이상(異常)이 있었고, 또 명 나라 일관(日官)이 본국 행인(行人 사신(使臣))에게 말하기를, “너의 나라의 고인(高人)이 장차 불리하게 됐다.”고 했는데, 과연 그대로 들어맞았으니 아, 철인(哲人)의 생졸(生卒)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4월 6일에 산천재 뒷산에 안장됐다. 선생은 기우(氣宇)가 고일(高逸)·응중(凝重)한 데다가 엄의(嚴毅)·정대(正大)하여 장경(莊敬)한 마음을 항상 내부에 존양(存養)하고 태만(怠慢)한 기색을 일체 형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윽한 방 안에 혼자 거처할 적에도 어깨와 등이 꼿꼿했고 일찍 일어나 조용히 앉았을 적에는 묵관(默觀)·정사(精思)에 들어 아무도 없는 것 같았으며, 학문에는 전혀 경의(敬義)를 요체(要諦)로 삼아서, 측근에 있는 집물(什物)에 명(銘)을 붙여 자경(自警)한 바가 모두 이 경의였으므로 선생의 신채(神彩)가 고결(高潔)하고 용모가 준위(俊偉)했다. 사(私)를 퇴치하는 데는 단칼로 두 동강이를 내듯 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물[水]이 만 길 절벽을 내리쏟듯 하여, 절대로 우물쭈물하거나 구차한 예가 없었다.
평소에도 가인(家人)들이 감히 망녕되이 지껄이거나 함부로 웃지 못하여 내외가 엄격했으며, 더욱이 효우에 독실하여, 어버이를 모실 적에는 침착하고 조심하는 선행으로써 봉양하여 어버이의 심지(心志)를 기쁘게 해 드리는 데 전력했고, 친상(親喪)을 당해서는 피눈물로 애모(哀慕)했으며, 전후상(前後喪)에 다 초막(草幕)을 짓고 시묘(侍墓)하면서 하인(下人)들에게 가사(家事) 때문에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했고, 조객(吊客)이 있을 적에는 그저 엎드려 곡(哭)하면서 답배(答拜)할 뿐, 한 번도 말을 나눈 예가 없었다. 아우 환(桓)과의 우애가 더욱 돈독하여 언제나 말하기를, “사람의 지체(支體)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하고, 같이 한 담장 안에 살면서 한 문으로 드나들었다. 아무리 산림(山林)에 물러나 있으면서도 시사(時事)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유출되어 매일 밤중에 혼자 앉아 비가(悲歌: 애절한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으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했으며, 벗을 사귀는 데는 반드시 그 사람됨을 심리해 보아서 뜻에 맞지 않는 자는 아무리 달관(達官)·요인(要人)이라도 행여 자신을 더럽힐까 두려워하면서, 청송(聽松, 주: 성수침·成守琛)·대곡(大谷, 주: 성운·成運)·동주(東洲, 주: 성제원·成悌元)·황강(黃江, 주: 이희안·李希顔)·삼족당(三足堂, 주: 김대유·金大有) 등 제군자(諸君子)와 마치 지란(芝蘭)처럼 좋아했고, 퇴계 선생과는 글을 왕복(往復)하면서 성리(性理)를 변론했다. 일찍이 퇴계에게 보낸 글에, “평생 동안 태산 북두처럼 경앙(景仰)한다.” 했고, 퇴계는 선생을 논하기를, “군자 출처(出處)의 의(義)에 부합된다.” 했다.
선생은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어 각기 그 재주에 따라 지시했고, 질문이 있을 적에는 반드시 세밀히 분석하여 있는 대로 밝게 해석하므로 듣는 이가 환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폐단은, 고원한 데 따라가기만 좋아하고 일신에 절당한 병통은 살피지 않는 데 있다. 성현의 학문은 애당초 일상생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을 버리고 지레 심오한 성리(性理)만을 연구하려 한다면, 이는 아무리 성(性)을 다하여 명(命)에 이른다 하여도 효제(孝悌)에 근본한 것이 되지 못한다.” 했고, 또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미사오지(微辭奧旨, 주: 은미한 말과 깊은 뜻)는, 선유(先儒)가 서로 이어 천명해 놓았으니, 배우는 이는 알기 어려울까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는 실제가 없을까를 걱정해야 한다.” 했으며, 글을 읽다가 요긴한 대문에 닿으면 반드시 세 번씩 되풀이하고야 넘어갔고, 이어 두 권의 책자를 만들어 이름을 《학기유편(學記類編)》이라 했으며, 문집 몇 권이 세상에 전한다.
상(上)이 치제(致祭)와 아울러 곡식을 부의했고 대사간(大司諫)에 추증했으며 뒤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하고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진주(晉州)·삼가(三嘉)·김해(金海) 등 모든 고을의 장보(章甫, 주: 유생·儒生)가 다 사우(祠宇)를 세워 향사(享祀)하고 있다.
선생의 휘는 식(植), 자는 건중(楗仲)이다. 조씨(曺氏)는 창녕인(昌寧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