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충신과 배신 -정개모 합천군 문해강사

정개모 문해강사

조선 왕조 27대, 519년 권력 투쟁사를 살펴보면 태종의 형제와 처남 참살, 세조의 왕위 찬탈, 연산군의 폭정, 당파대립 등 권력 투쟁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조선 세종 당시 성삼문과 신숙주는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의 공로자요, 신숙주가 한 살 많으나 절친한 친구간이다. 특히 신숙주는 세종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쳐 요직을 두루 거침은 물론 두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관료이자 학자이다. 하지만 이들은 세조 계유정난으로 말년에는 서로의 운명이 갈라지게 되고 신숙주는 예부터 수양대군과 정치적 유대관계를 맺어오던 막역한 사이며, 성삼문은 굶어 죽을진대 고사리는 먹지 않는다는 백이.숙제를 비판한 忠臣不事二君(충신불사이군)이다.
문종에 이어 세자 홍위는 1452, 6월 조선 제 6대 단종 임금으로 왕위를 계승한다 12세 어린나이에 등극한 단종은 어머니, 할머니도 일찍 죽어 수렴청정도 할 수도 없는 비운의 임금이었다. 앞서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에 국사를 맡기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자 이들은 모든 사직을 장악하는 등 실제 단종은 바지 임금에 불과하였다. 이에 군권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겸직한 수양대군(이유)은 한명회를 총지휘자로, 신숙주를 책사로 하여 황보인.김종서 등 수많은 신료들을 제거하고 유배시키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이때 위험을 느낀 단종은 즉위 3년만에 스스로 옥쇄를 숙부 수양대군께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난 뒤 강원도 영월 동강 인근 유배 길에 오르게 된다.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조선 제 7대 세조 임금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에 세조의 두터운 신망을 받는 신숙주는 명나라에 파견되어 세조를 임금으로 승인 받아온 공신이었으며 단종을 사사하려는 등 단종 복위운동을 저지하게 된다. 이때 성삼문과 신숙주는 서로 지향점이 달라 갈라서게 되며, 신숙주는 세조의 막강한 공신으로 不次擢用(불차탁용) 하나 성삼문은 단종 복위 사육신의 핵심으로 능지처참 당하게 되는데 일부 백성들은 이때 신숙주를 줏대 없고 잘 변질되는 ‘숙주나물’이라 빗대는 수치스런 풍문도 있다. 특히 신숙주 부인 윤씨는 성삼문과 함께 죽어야 하는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자 성삼문과 어떤 사인데 왜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오냐, 부끄럽지도 않느냐 했던 부인 윤씨의 남편 비난도 전해진다. 당초 성삼문 등 사육신은 세조가 명나라 사신 접견시 틈을 타서 살해코자 하였으나 김질,. 정창손 등의 밀고로 그만 거사가 밝혀져 세조는 성삼문 등 사육신에 대하여 모진 고문과 회유도 하였으나 이들은 끝내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치 않고 ‘나으리’라 불렀으며, 마지막 가는 형장에서 성삼문은 세조 옆에 서있는 신숙주를 향하여 의리를 저버린 배신자라 크게 질타하자 임금 뒤로 숨어 버렸다는 비겁한 처사도 있었다 한다. 이때 성삼문은,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었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곤건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는 충신의 기개를 나타내는 시 한 수를 읊고 능지처참, 생을 마감 하시었다. 그럼 지금에 와서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대세를 지향하며 세조를 도와 막강한 권력을 펼치는 신숙주의 선택이 옳은지, 대쪽 충신의 기개로, 세조와 신숙주를 비난하며 단종복위 운동을 전개하다 희생당한 성삼문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쉽게 판단키 어렵다. 대세의 운명을 따라야 할지, 不事二君 (불사이군)의 기개를 지켜야 할지, 참 어려운 명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