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조광조를 생각하며 -정병수 공인회계사

정병수 공인회계사

신분당선 용인 상현역으로 이사 온 지 3년이 지났다. 당초 2년만 살고 서울로 복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주인이 중도에 아파트를 매각하는 바람에 뒤엉켜버렸다. 다행스러운 것은 현재 거주하는 상현동에서 서울 강남까지의 교통이 지하철로 30분 정도의 편리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또한 우리 아파트 인근의 문화재를 편하게 볼 수 있는 것도 답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쏠쏠한 재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문화재는 유명도가 낮아 일부러 찾아오기는 더 애매한 곳이다. 그 중의 하나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묘와 심곡서원을 들 수 있다.
화제를 바꾸어 재경 합천문인회 회원 중에는 문학작품은 물론이고 애향심이 남다른 분이 많다. 선문대학교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다 정년을 하신 안병국 교수도 예외가 아니다. 문인회 모임에 처음 참석하여 어색할 할 때였다. 여러 이야기 끝에 안 교수님이 비교문학을 전공하셨다기에 수암 고 이경선 교수가 저의 장인이라고 하니, 안병국 교수는 놀라시면서 살갑게 대해주셨다.
교수님은 언제나 여유러움으로 삶을 관조하며 사시는 것 같다. 어쩌면 제 장인 어른과 성품도 비슷하고, 젊을 때부터 약주도 좋아했다하니 때로는 사모님을 불안하게 했을 지도 모르는 면도 비슷하다. 어느 날 내가 용인 상현동 근처에 조광조 묘와 심곡서원이 있으니, 역사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답사할 가치가 있으므로 시간을 내 주시면 안내를 해 드리겠다고 제의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안 교수님은 피해를 주지 않으러는 의도인지, 아니면 제의한 내용을 잊었는지는 몰라도 한 동안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5월 어느 토요일에 우리 동네로 오겠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현장을 이미 몇 번 답사한 적이 있으나, 가이드를 자청했으니 실망은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온다. 그래서인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내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답사 현장을 향하여 뚜벅뚜벅 걷고 있는 것이다.
조광조의 묘는 광교산 1번 등산로 입구 왼쪽 대로변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주위가 조광조의 고향이다. 묘지 입구엔 신도비(神道碑)가 우뚝 서 있다. 신도비란 고관들 묘에 대한 안내석이다. 조광조 묘는 한양 조(趙)씨 십여 봉분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나는 길가에 서서 우뚝 솟은 신도비를 바라보다가 타임머신을 타고 500여년 전으로 거슬려 올라가 본다.
첫 화면은 우리나라 전남 화순이다. 당시는 능주로 불리었다. 금부도사가 도착하니, 큰 소리로 “ 죄인은 사약을 받으시오.”
“예? 죄인은 아직 짐도 채 풀지 않았는데……., 진정 상감께서 보낸 것이 맞단 말이요? 사약을 마시기 전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나를 옹호했던 정광필 영의정은 어떻게 되었으며, 나를 못살게 굴던 남곤은……. ?”
죄인은 목이 메인다.
“영의정 정광필님은 중추부 영사로 좌천당했고, 그대와 대립했던 남곤은 좌의정으로 실권을 장악했소이다.”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다만, 해가 지기 전에 사약을 마실 터이니 시간을 조금만 허락하여 주실 수 없는지요?”
유배온 죄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세가가 아니었던가? 금부도사는 말없이 눈만 찡끗한다.
얼마 후 정암 선생은 방문을 열고 나와 금부도사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한성부를 향해 큰절 3배를 올린 뒤 방금 써 온 절명시를 읊는다.
愛君如愛父 (애군여애부)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 (우국여우가) 나라 걱정하기를 집안 걱정하듯 하였다
白日臨下土 (백일임하토) 밝은 해가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昭昭照丹衷 (소소조단충) 내 충정 밝디 밝게 비춰주리라.
이 시를 쓸 때 손이 떨리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권력의 무상함과 인심의 돌변이 허무하고 허탈하였을 것이다. 이윽고 숨을 고른 뒤 사약 한 사발을 들이마신다. 여전히 몸이 꼿꼿하다. 다시 한 사발을 더 달라고 청해 마시니 마침내 쓸어지며 눈을 감는다. 38세의 젊은 나이다.
정암은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한 분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신하들이 반기를 들고 성공한 덕분으로 졸지에 왕이 된 가 중종이다. 당연히 중종은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 준 일단의 무리들에 둘려쌓여 정사를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 역사에서는 훈구파(勳舊派)라 부른다.
중종은 훈구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과거 시험을 직접 치루고 발탁한 자가 바로 젊은 학자인 조광조다. 그는 중종의 사랑에 힘 입어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활동하였고, 사헌부 대사헌도 지냈다. 소격서 철폐 등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중종 등극에 공이 크다고 벼슬을 받은 자 중 가짜가 4분의 3이나 되는 걸 알고 상급으로 준 전답, 노비 등을 모두 회수하였다. 역사에 나오는 ‘위훈삭제‘ 사건이다. 이들은 조광조의 원수가 되는 것은 자명하다. 거기에다 성리학적 도학정치를 구현한답시고, 임금인 중종에게 아침 저녁으로 솔선수범하여 경연 등을 할 것을 강요한다.
이에 중종은 차츰 조광조에 염증을 느끼게 되고, 이를 눈치 챈 훈구 세력이 중종과 중중의 여인들을 사주하기 시작한다. 그 무리 속에는 남곤(南袞)이라는 친구가 앞장 서 설친다. 드디어 1519년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이를 빌미삼아 조광조를 역모로 몰아 유배시킨다. 사약을 받아 죽은 후 반세기가 지나 기대승 등의 상소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또한 그를 기리는 심곡서원이 건립되었다. 심곡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서원이다.
그러나 신도비가 세워지고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만들어진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은 것이 보상될까?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부슬비가 어느새 밝은 햇살의 싱그러운 5월로 변했다. 그리고 하늘엔 무지개가 떠 있다.
“그래, 삶이란 저 아름다운 무지개가 아니라 스쳐 가는 비나 바람인지도 몰라! 그런데도 우리 인생은 뭘 그리 아등바등하며 살아 가야만 될까? 문학을 전공한 안병국 교수님이 오시면 문화재 답사도 중요하지만 인문학을 주제로 토론을 제의해 보면 어떨까 싶다. 안 교수님이 좋아하는 막걸리 한 잔을 앞에 놓고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