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운잡기| 사모곡(思母曲) – 권해조 논설위원
창 밖에 비가 내리는 오늘, 문득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난다. 어느새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68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의 어머님은 하동정씨(河東鄭氏)로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14세손인 기현(璣鉉)의 1남5녀의 막내따님으로 태어났다. 우리 고향과 그리 머지않은 함양군 수동면(水東面) 우명리(牛鳴里) 780번지에서 1915년 을묘년 1월4일 출생해 1952년 임진년 1월 27일 37세로 운명하셨다. 부모님 두 분이 천생연분인지 어머님의 기제일(忌祭日)이 음력 정월 27일인데 47년 후에 돌아가신 아버님의 기제일은 음력 정월 26일로 하루 앞날이다.
어머님은 일제강점기였던 1933년 11월 20일, 18세 나이로 21세의 선친에게 시집와 4남을 두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세상을 떠나 지금도 어머님의 생전 모습이 어렴풋이나마 떠오른다. 내 기억으로는 어머님이 제법 키도 큰 편이고 상당히 인자하신 성격이었는데, 얼굴에 검은 복점 하나가 있었다. 그래서 인지 이름이 정필점(鄭畢点)이였다.
어머님은 6.25전쟁 기간에 나의 둘째동생을 출산하다 돌아가셨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불상사다. 당시 시골에는 병원이 있을 리 없다. 우리 면에는 왜정시대 일본 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돌팔이 의사 한 명 뿐이었다. 어머님은 나의 5대 조부 기제일에 떡방아를 찧다가 산통(産痛)이 있어 방에 들어가 조리를 했으나 끝내 운명하시고 어린 동생도 세상 구경을 못하고 말았다. 당시 선친께서도 출타하시고 형님들도 학교 때문에 외지에 나가 있어 어린 내가 할머님의 재촉을 받아 2km 떨어진 서재 밑 금성(錦城)마을에 사는 돌팔이 의사를 서둘러 모시고 왔으니 허사(虛事)였다.
내가 보고 들은 어머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었다. 몇 년 전까지 살아계셨던 막내숙모님 말씀에 의하면 음식과 바느질 솜씨가 일품이었고, 예의범절과 사교술도 대단하였으며, 동서 간 우애도 남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글(諺文)을 잘 하셔서 당시 동네에서 결혼하면 안사돈끼리 주고받은 편지는 어머님이 도맡아 쓰셨다고 했다.
나는 어릴 때 유별난 개구쟁이로 어머님의 속을 많이 상하게 하였다. 가끔 친구들과 장난치다 다치면 친구들을 만나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충고도 해 주시고 나를 무척 아껴주셨다. 한번은 대구에서 유학중인 막내삼촌께서 방학 때 고향에 오면서 나의 선물로 운동화를 사오셨다. 당시 모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운동화는 나에게는 큰 보물이요 자랑꺼리였다. 하루는 친구들과 어울려 개울 건너로 놀러갔다가 운동화를 아끼려고 개울가 모래 속에 묻어두었는데 올 때 찾으니 누가 훔쳐갔는지 없어져 어머님과 함께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꾸중을 들은 기억이 난다.
어머님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의 한복과 우리 형제들의 양복을 직접 만들고 빨래도 하셨다. 특히 무명(綿布) 광목(廣木)을 구입해서 검정 물을 들여 시집올 때 가져온 재봉틀로 우리들의 양복을 직접 만들어 주셨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식모와 막내숙모도 있었지만 6.25전쟁을 피하기 위해 의령으로 시집간 고모네 식구들까지 와서 머슴 3명과 매일 20여명 식구들의 식사 준비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끼니마다 걸인(乞人)들, 과객(過客)들이 줄을 이어 하루에도 몇 번씩 밥상을 차려냈으나 별로 짜증을 내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동네사람들은 염라대왕이 착한 사람을 먼저 데리고 간다고 하드니 맞는 말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어머님의 흑백사진 한 장도 없으나 어머님이 직접 쓰신 편지 몇 통은 나의 보물로 여기며 갖고 있다. 어머님 돌아가신 후 고향인 대병면 성리(城里) 오동골(梧棟村) 안산(案山) 공수곡(公守谷) 묘좌(卯坐)에 안장했다가, 10여년 뒤 삼가면(三嘉面) 두모리(斗毛里) 우이곡(牛耳谷) 간좌(艮坐)로 이장하여 그곳에서 영면하고 있다.
이제는 어머님을 다시 볼 수도 없고 음성도 들을 수 없는 불귀의 몸이 되어 고향 우이곡의 깊은 산속 양지바른 곳에서 깊은 잠을 자고 계시지만 어머님은 나를 낳아주시고 철부지 어린 시절 사람 되게 길러주신 고마우신 분이다. 생전에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아픈 마음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도 조용히 어머님을 생각하며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