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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한 팀의 형제자매 – 정병수 공인회계사

공인회계사에 합격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조간신문 기사를 통해 알았다. 때는 1979년 12월이다. 졸업식을 1달도 남기지 않던 때였다. 대학 재학시절 받은 조건부 장학금 때문에 한국전력에 근무하던 중이었다. 기쁜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건만 어느 누가 우연히 신문기사를 봤던지 내 옆좌석 직원을 통하여 확인이 들어온다. 아니라고 할 수 없어 ‘맞습니다.’라고 했더니, 금세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간다.
당시 나의 상사인 지점장도 직접 내 자리 옆으로 내려와 와 “내가 자네를 잘 알지는 않지만,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아 유심히 보고 있는 중인데 공인회계사라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을 했다니 진심으로 축하하네.”라고 칭찬을 한다. 당시 공인회계사 합격자 수가 적어서인지 여러 회계법인으로부터 합류하기를 바란다는 전화를 조금은 귀찮을 정도로 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본사 인사계장에게 사실을 알리고 상의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정군! 일단 축하하네! 우리 기관으로서는 계속 근무해 주면 좋겠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의 장래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여 판단하세.”
며칠간의 고민 끝에 평소 약간의 안면이 있는, 지금까지 존경하는 선배 김00 회계사의 권유로 3월부터 함께 일하기로 했다. 때는 사회가 민주화의 봄을 거세게 요구하던 어수선한 80년대 봄이었다. 나보다 먼저 입사하기는 했지만 아직 회계감사 실무를 체험하지 못한 신참 회계사 몇 명과 사내 직무교육(OJT)을 받았다. 팀으로 회계감사를 하는 일의 특성상 일하는 방법을 통일하고 상호 교감도 있어야 일의 효과를 얻을 수 있기에 이 교육은 꼭 필요했다. 내용은 롤 플레잉(role playing) 등 실무 위주이고, 담당 파트너(parter)와 개인 면담을 끝으로 교육은 종결된다. 2주간의 벅찬 교육을 마치고 드디어 면담 시간이 왔다. 파트너는 언제 체크했던지 교육에 임했던 나의 태도를 높게 평가해 당황스러웠다. 면담의 대부분은 앞으로 감사에 임하는 자세와 격려 그리고 덕담이 대부분이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정 선생은 적극적이고 긍정적 마인드여서 일을 잘 할 거요! 그래 같이 힘을 합하여 좋은 회계법인도 만들고, 훌륭한 전문가도 되도록 해 봅시다.”
“예,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려 하는데, 안 들었으면 좋았을 질문이 귓전을 울린다.
“참! 정 회계사는 형제자매가 몇 명이나 되지요?”
지금은 개인 프라이버시라고 생각해 금기시하기도 하지만, 40년 전 당시는 친근함을 나타내는 예사로운 것에 불과한 내용이다. 하지만 형제자매가 몇 명이냐는 질문은 언제부터인가 나에게는 입 밖으로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금기 내용이었다. 때문에 나는 두루뭉실한 대답으로 이 위기를 넘길 셈이었다.
“좀 많은 편입니다.”
“몇 명인데요? 나도 7남매나 돼요! 나 보다 많다 말이요?”
“예!”
“그래요? 아직 나 보다 형제자매가 더 많은 집안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어도 만난 적은 없어요!”
나의 입에서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고 망설어진다.
“그럼 9명입니까?”
“그것 보다 많습니다.”
“대체 몇 명이기에 그렇게 뜸을 들여요?” “축구 1팀은 됩니다. 혼성팀이기는 하지만요. 여자 남자 여자 남자….여자로 끝납니다. 남녀가 지그재그로 태어났더군요. 큰 누님이 1938년생이고, 막내 여동생이 1962년생입니다. 어머님은 만34년간 5남 6녀 11남매의 임신, 출산, 육아로 고생하셨고, 거기에다 11대 종부이기도 해 제사 등 무거운 책임감으로 사시다 보니 마음의 병이 되어 내가 대학 3학년 때 60세를 채 넘기지 못하고 저와 이별했습니다. 제가 11남매의 정 중간인 6번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니 좀 쑥스럽습니다.”
“와! 정말 대단한 부모님을 두셨네요. 어머님 생각하면 코등이 찡하겠네요. 그런데 그것은 결코 숨길 일도 아니고, 기(氣) 죽을 일도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훌륭한 부모님을 생각하며, 역설적으로 우리는 직업적 전문가로 다시 태어나도록 합시다. 파이팅!
어머님의 강인함은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요즘과 같이 출산율이 낮은 상황에서는 국가로부터 훈장을 추서받아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런 면담이 있는 후 나는 간혹 담당 파트너로부터 “정 회계사! 아니 정씨 축구팀 센터 보드!”라는 애교어린 별명을 듣기도 했다.
2002년 6월 벌어진 한일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이 7전 3승 2무 2패라는 성적으로 오랜 숙원인 16강 진입을 넘어 4강에 올랐다. 한국의 4강 진입은 네덜란드 출신의 거스 히딩크(Guus Hiddink)감독의 과학적인 훈련과 온 국민의 성원으로 이룬 쾌거였다. 온 국민은 ‘붉은 악마’를 중심으로 열광적인 응원을 펼쳤으며 또한 수많은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길거리응원을 펼쳤다. 이 월드컵 4강과 붉은 악마들의 함성은 축구장에서 뛰는 11명의 선수를 영원히 우리의 신화가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 우리 11남매는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고, 어느새 소득차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에는 외국으로 이민 간 형제도 있어 한 자리에 모두 모이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20여 전 아버님 장례식 때 11남매가 모두 모이고 남자 형제들은 굴건제복차림으로 여자 자매들은 흰 치마 저고리를 입고 곡(哭)을 하며 꽃상여를 따르던 모습도 오늘날은 찾아보기 힘든 옛 일이 되어가고 있다.
혹시 한 가정의 형제자매만으로 축구팀을 구성하여 시합을 하게 한다면 우리의 막강한 응원단과 함께 기권승을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응원단 구성수는 5남 6녀의 배우자 11명, 손자손녀가 친가 11명, 외가 17명으로 28명, 증손자손녀도 친가 16명, 외가 22명으로 38명이니 합하여 77명이나 되는데 어느 팀이 감히 도전할 생각을 하겠는가? 5남 6녀 형제자매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