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을 들녘 억새를 보며 – 문경자 수필가
누렇게 익은 벼들은 농부들의 부지런한 손길로 가을걷이가 끝나고, 빈 들판에는 드문드문 잘 익은 이삭들이 널려 있었다. 막 아침 밥을 짓고 구수한 된장찌개가 끓은 부엌처럼 따듯한 온기가 남았다. 논 두둑에는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참새들이 지저귀는 듯하였다. 아무리 베어내고 베어도 뿌리와 줄기들이 기어 나와 억센 손을 마주 잡고 영역을 넓혀 가는 대단한 가족이다. 억새는 조용한 분위기에 쓸쓸함도 잊고 푸른 날의 시절을 그리며 은빛깔의 꽃을 피운다. 억새꽃은 해질 무렵 노을을 받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억새는 볏과에 속하며 꽃이 피는 시기는 9월이다. 큰 무리를 이루고 사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산야에서 자라며, 바람센 언덕 배기, 메마른 흙더미 위에, 무덤 많은 야산 발치, 뙈기 밭 두둑, 저 너머 동네로 가는 길섶, 강가의 모래언덕 같은 곳에서 억세게 잘 자란다. 쓸모 없는 땅을 독차지하는 성격이 좋은 억새다. 한편으로는 강건하고 뾰족하고, 쌀쌀맞은 성격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때가 많지만, 절대로 기죽지 않고 나름 대세를 이루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파란 풀잎 줄기에서 탄생하는 억새는 핑크 빛을 띄고 점점 자라서 줄기가 볼록하여 화살모양으로 튀어나와 활짝 피어난다. 코스모스, 구절초, 각시취, 투구꽃, 한란, 분꽃, 핑크뮬리니 하는 가을꽃이 예쁘다지만 억새꽃이 제일이다. 이맘때면 고향의 가을 들판에 그림 같은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산골의 밭뙈기나 논은 높이가 일정하지 않았다. 논둑 밭둑 그 언저리에 늦 가을이면 군데군데 모여 피는 억새꽃은 빈 들판을 환하게 만들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낫질에도 쉽게 잘려질 몸 아니다. 가을바람이 불면 나약하게 보이려고 그냥 살랑살랑 봄바람에 바람난 여자처럼 애교를 부려 보는 거야. 섣불리 낫을 갖다 대면 번뜩이는 낫의 날보다 더 강하게 나오거든. 들길이나 산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그 자태에 반해서 손으로 쓰윽하고 한번 훑어보곤 했지. 가위가 종이를 오려내는 느낌이 왔다면 분명 일자로 그어진 손가락에 붉은 선이 생겼을 게다. 가끔 경험을 해보는 것이라 예사로운 일이었다.
농사철이 되면 들판에도 농부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이웃집 돌이 아버지는 깡마르고 광대뼈가 남보다 튀어나왔다. 눈썹은 몇 개가 허옇게 길었다. 조상이 물려준 눈썹이라 함부로 자를 수가 없다며 억세게 거짓말을 잘했다. 입술은 약간 얇게 생겼다. 턱수염은 면도를 하지 않아 너저분하였다. 돌이 아버지는 그래도 일을 열심히 하는 모범적인 농부였다. 어쩌다가 마음이 내키면 게으른 돌이 엄마도 양심은 있는지 논에 새참을 날라 주기도 하였다. 멀찌감치 보이는 돌이 엄마를 발견하고 웃음을 짓는 돌이 아빠는 성격이 좋아 동네 사람들에게 미움은 사지 않았다. 억새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돌이 엄마는 찌그러진 노랑 주전자를 들어 사발에 막걸리를 따랐다. 안주는 된장에 풋고추였다. 돌이 엄마는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돌이 아버지 입에 넣어 주었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노! 오늘은 참으로 억세게 운이 좋은 날이었다. 지나 가는 참새떼가 들판을 떠나지 않고 짹짹거렸다. 억새도 막걸리 한잔 하고 노래 불렀다.
막걸리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농사일을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좋아하는 시아버지다. 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없는 분이다. 어느 해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나는 고구마를 삶고 주전자에는 아버님이 좋아하는 막걸리를 들고 논으로 향했다. 가는 길이 낯설고 멀기만 했다. 내가 자랄 때 고향에서의 가을은 먹을 것이 많고 마냥 신나는 계절이었지만 어른이 되어 맞는 가을은 너무도 낯설었다. 신작로 길을 따라 가는 길은 눈에 익지 않아 애를 먹었다.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억새는 어느새 한 무리 지어 꽃이 피었다. 나를 향해서 일제히 손을 흔들어 반기는 듯하였다. 힘을 내자. 한 고개를 넘어서니 논이 보였다. 논둑마다 피어 있는 억새꽃은 탐스러운 꽃무리를 이루었다. 아버님은 웃음꽃을 피웠고 어머님은 한아름 볏단을 묶고 있었다. 그 광경이 마치 내 눈에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기쁨에 벅찼다. 막걸리를 한 사발 따라서 아버님께 드렸다. 며느리에게 자상하고 미소로 모든 것을 표현해 주시던 아버님의 모습은 지금도 억새꽃이 피면 생각난다. 논둑의 가을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하얀 무명옷을 입은 시부모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걷는다. 억새가 옷깃을 스치고 꽃잎이 옷자락에 붙기도 하였다. 이렇게 가을걷이를 했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골짜기 논을 제외하면 논둑이 잘 정리되어 기계를 이용하여 농사를 쉽게 짓고 있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모심기도, 벼를 베는 일도 수확하는 것도 사람의 손이 필요가 없어졌다. 가을 빈 들판에는 하얀 뭉치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이색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가는 한 농민에게 물어봤더니 “공룡알”이라고 불렀다. 소 사료로 팔기 위해 추수 후에 남은 볏짚을 모아 압축한 볏짚 더미들이다. 벼농사에 비해 “공룡알”수익률이 엄청나게 좋은 편이라 했다.
이웃들과 오순도순 나누어 먹던 막걸리 한 사발, 참새떼 포르르 날고, 억새가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가을 들녘을 생각하며 환하게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