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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이 낳은 조선의 왕사 무학대사 학술대회 개최

무학대사 업적 및 역사적 위상 재조명

합천군(군수 문준희)이 주최하고 창원대학교 박물관이 주관하는 합천이 낳은 조선의 왕사 무학대사 학술대회가 11월13일 합천군 주요관계자와 관련단체, 연구자, 군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합천박물관에서 개최됐다.
이번 학술대회는 합천의 대표인물인 무학대사에 대한 역사적 위상을 재조명하는 계기뿐만 아니라 선생의 업적 및 관련 유적에 대한 성과를 알리고자 마련하게 됐으며, 이윤상 창원대학교 박물관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주제발표, 종합토론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주제발표는 1.위양근(가야역사문화연구원) 조사부장의 <무학대사와 무학대사 유허지> 2.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교수의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상황과 무학대사> 3.강호선(성신여자대학교) 교수의 <고려말 조선초의 불교계와 무학대사> 4.김승호(동국대학교) 교수의 <전승담에 나타난 무학의 생애와 형상> 등 4가지 발표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이윤상(창원대학교 박물관장) 교수의 주재로 발표자 및 토론자(박현열 한라문화재연구원 조사부장, 홍순민 명지대 교수, 김용태 김종진 동국대 교수)의 종합토론이 펼쳐졌다.
무학대사는 고려말, 조선 초 고승으로 삼기(三歧)현, 즉 지금의 합천군 대병면 대지리 출신이며, 조선의 건국과 도읍지를 한양으로 천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대사는 조선 초기 나라가 안정하고 정착하는데 헌신했으며, 특히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건국된 조선에서 독특하게 불교인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았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합천군 서광운 담당은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무학대사의 위상을 재조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합천 군민이 하나의 뿌리를 찾는 계기를 마련했다”면서 “향후 지속적인 학술활동과 문화행사, 유적지 정비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박황규 기자

무학대사 학술대회 참관기

  1. 합천이 낳은 역사적 인물 중 무학대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한양(漢陽), 지금의 서울(seoul)을 만든 1등 공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합천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지역에서의 무학대사 흔적 찾기, 테마 만들기가 약하다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번 학술대회를 통한 학문적 고찰이 새로운 활력이 됐으면 한다. (학술대회 발표와 토론에서 있었던 주요 내용과 감상을 단편적으로 스케치하듯이 열거한다.)
  2. 위양근 연구원의 발표에 의하면, 무학대사가 합천 삼가 출신인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여러 문헌과 고지도를 통해서 그것을 고증할 수 있다. 근래 모 지방자치단체에서 무학대사 출생지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으나 거의 고증이 되지 않아 해프닝으로 끝났다.
  3. 무학대사와 관련한 합천 지역 흔적 찾기, 유적 복원이 필요하다. 대병면 대지리에 폐사지는 무학대사 출생지 일대에 세워진 사찰로 추정된다. 이 사찰은 고문헌에 의하면 사나사(舍那寺) 또는 부도사(浮屠寺)로 불리우고, 황매산 북쪽50리에 위치하며 무학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4. 조선왕조실록, 지리지 등에는 무학대사의 고향이기에 삼기현으로 승격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개 고려시대부터 왕사-국사가 물러날 때 연고지를 승격시켜주거나 하산소라고 해서 특정한 사원을 지정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무학대사 고향을 승격함과 동시에 무학대사가 고향에 내려올 때 머문 사원이 바로 대병면 대지리 부도사(사나사)로 추정한다.
  5.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에 의하면, 무학대사 민간에서 가장 유명하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승려로 꼽힌다. 그러나 무학대사의 실제 역사적 행적을 살펴보면, 역사자료에서 확인해 보는 것, 문헌에서 찾아보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다. 무학대사에 대해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역사적 확인된 것은 아니다.(예를 들면 한양천도와 관련한 일화, 왕십리 지명이야기 등은 대개 설화라고 한다.)
  6. 무학대사와 관련된 자료는 조선초기에 나오다가 200년 정도 자취를 감춘 후 선조실록 이후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고려사에는 딱 1회 나온다. 이렇게 역사적 자료가 빈약한 것에 대해 1)의도적인 자료의 인멸 2)원래 없었다 로 볼 수 있다. 목은 이색은 많은 승려와 교류했으며 많은 글을 썼는데 여기에 무학이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7. 임진왜란 이후 무학이 지었다는 도참기(圖讖記)가 실록에 언급되고 그와 동시에 민간에서 무학과 관련된 이야기가 만들어지며 조선후기 민중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왜 그랬을까?
  8. 강호선 교수에 의하면 무학은 그 위상에 비해 무학의 불교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지공과 나옹의 계승자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선승이라는 점에서 무학은 여말선초를 휩쓸었던 임제종의 전통에 있었던 인물로 보여진다.
  9. 김승호 교수는 무학을 주제로 이뤄진 여러 전승. 설화 이야기 등을 의미를 짚어보았다. 무학설화는 주로 풍수담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대개는 풍수적 인물로 일반적으로 바라본다. ‘터를 잘 보는 양반이다’라는 것이다. 무학 이야기의 대표적 사례 4가지 정도 말하자면, 1)풍수가 2)영웅 3)신승(神僧) 4)효자 이다.
  10. 이윤상 창원박물관장의 총평. 무학 관련 사료가 많지 않다. 조선 초기 대단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민간에 알려진 것보다 크지 않았다. 조선후기에 무학대사에 대한 다양한 전승들, 무학대사에 대한 신앙이랄까…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그 둘 사이에 연관성도 있겠지만 크게 연관 찾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그런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11. 특이하게 이야기는 많은데 자료가 없다.(홍순민 교수) 왜 풍수가로 인식됐을까?
    12.무학과 관련한 문헌이 빈약하다는 것, 민간에서 풍수가로 크게 알려져 관련한 설화가 많다는 것 등 현재까지 무학과 관련된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학문계에서는 지속적인 연구활동이 있어야 할 것이고, 지역에서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유적지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현창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박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