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뉴스홈

남명선생 타령지지(南冥先生 妥靈之址) – 최상호 유림회장

남명 선생 유적의 편린(片鱗)이 가회 장대(佳會 將臺)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내용인즉 가회면 장대리에 “南冥先生妥靈之址남명선생타령지지”라고 인출(印出)된 고지도(古地圖)를 찾았다고 한다. 참으로 반가운 사실(史實)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대북파(大北派)가 몰락(沒落)하면서 역사에서 지워져, 선생의 기록이 희소(稀少)한데 선생의 흔적 발견(痕迹 發見)은 참으로 생광(生光)스럽다. 용암서원묘정비(龍巖書院廟庭碑)에 남명 선생에 대하여 주상(主上)이 제문(祭文)과 곡식(穀食)을 내리고 대사헌(大司諫)에 추증(追贈)했으며 뒤에 다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하고 문정(文貞)이라 시호(諡號)했다고 하였으며 “晉州三嘉金海諸邑章甫皆設祠以享焉;진주삼가김해제읍장보개설사이향언”[진주晉州 삼가三嘉 김해金海 제諸 고을 선비들이 모두 사당(祠堂)을 지어 향사(享祀)를 드린다]이라 각자(刻字)되어 있어서, 여러 고을의 선비들이 선생의 학덕(學德)을 경모(敬慕)하여 추모(追慕)하는 제향(祭享)을 올린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는데, 구체적으로 향사(享祀)를 드린 장소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가회 장대(佳會 將臺)에서 찾게 되어 위의 묘정비 기록(廟庭碑 記錄)이 현시(顯示)되었다. 향후 진주晉州 김해金海에서도 타령지지(妥靈之址)가 발견되어 선생의 역사가 복원(復元)되기를 기대(企待)한다. 妥靈(타령)은 위패(位牌)를 모셔서 향사(享祀)를 드리는 것을 말 한다.
위의 글과 내용(內容)이 조금 벗어났지만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은 금년 11월19일자 합천신문에 ‘간쟁諫爭’이라는 난(欄)에 전호병 씨의 “가수현청嘉樹縣廳의 역사歷史”에 대한 글을 읽고 향토사(鄕土史)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반갑고 치하(致賀)해야 할 바이라 본인에게 대하여 그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고 신문에 게재하는 것은 적절치 못함으로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언론기관에서 분별없이 간쟁(諫爭)이라는 용어로 기사화(記事化)했다는 사실은 지적(指摘)하지 않을 수 없다. 간쟁(諫爭)이라는 말은 손윗사람이나 임금의 잘못이나 그릇된 처사(處事)를 고치도록 청(請)하는 사전적(辭典的)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삼가사적비(三嘉史蹟碑)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제(前提)로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삼가(三嘉)의 역사(歷史)를 일반인이 잘못 이해(理解)할 수 있는 단초(端初)가 될까봐 두려워서 마지못해 이 글을 쓴다. 역사(歷史)는 사실(史實)에 확실(確實)한 근거(根據)를 두고 써야 한다.


첫째, 삼가 역사(三嘉 歷史)의 가장 정확(正確)한 기록(記錄)은 삼가현읍지(三嘉縣邑誌)이다. 여기에 가수(嘉壽)와 삼가(三嘉;봉성鳳城)는 동일지역(同一地域)이 아님을 명백(明白)히 기록(記錄)해 두었다.

둘째, 가회(佳會)와 삼가(三嘉)를 통하는 길이 송곡(松谷)으로 통(通)하는 길이 유일(唯一)하다고 하고, 일제 강점기(日帝 强占期)에야 비로소 오늘날의 신작로(新作路)가 개설(開設)되었으므로 당시(當時)에는 교통(交通)이 불편(不便)하여 현청 소재지(縣廳 所在地)로는 가회(佳會)가 불가(不可)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교통수단(交通手段)이 당나귀나 사람이 직접(直接) 걸어 다녔으므로 넓은 길이 없었고, 산길이라도 가장 가까운 지름길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만들어 진 자연 발생적(自然 發生的)으로 만들어 진 것이 길이 되었다. 신작로(新作路)가 만들어 지기 전에는 가회(佳會)에서 삼가 대병(三嘉 大幷)으로 가는 큰 길이 가회 함방리(佳會 含芳里)에서 바깥 사우실(祠宇室)로 경유(經由)해서 안 사우실(祠宇室)을 넘어 삼가 문송리(三嘉 文松里)로 넘어 오는 이 길이 대로(大路)로서 기능(機能)을 하였다. 이 고개가 회현(晦峴), 망현(網峴), 화지현(花旨峴) 등으로 부르는 그믐재이다. 1910년 일제(日帝)가 토지 조사사업(土地 照査事業)을 할 때 만든 지적도(地籍圖)가 오늘 날까지 활용(活用)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도로(道路)가 표시(表示)된 지번(地番)은 나와 있지만 지금(只今)의 도로와 같은 도로는 아니고 산길이다. 삼가 문송리(三嘉 文松里) 道 1282번지 등으로 조선시대 도로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참고로 가회(佳會)에서 삼가(三嘉)를 통하는 신작로는 1927년 1차로 착공하여 암벽 등 난공사(難工事)로 5년간 방치(放置)되어 있다가,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을 졸업한 당시의 엘리트로서 25세에 가회면장(佳會面長)을 한 윤익현(尹翼鉉)이 예산(豫算)을 확보하여 진주(晉州)에 있던 토목회사 죽본조(土木會社 竹本組)에서 3840엔(円)에 낙찰(落札)되어 1932년에 완공했다.

셋째, 고을 이름에서 별칭, 별호(別稱, 別號)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쓰던 고을의 옛 지명(地名)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가(三嘉) 고을을 기산, 기양, 가수, 봉성(岐山, 岐陽, 嘉壽, 鳳聲) 등으로 사용되었음은 많은 전적(典籍)에서 확인(確認)할수 있다. 태종(太宗) 14년에 삼가현(三嘉縣)으로 사명(賜名)되었는데 후에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를 만들 때에도 가수현(嘉樹縣)이라고 한 것이 좋은 예(例)이다. 그러므로 가수(嘉壽)가 봉성(鳳城)의 별칭(別稱)이라고 하여 동일장소(同一場所)라고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추정(推定)이다.

넷째, 자기소(磁器所)가 가수현(嘉樹縣)의 서쪽 감한리(甘閑里)에 있다고 기록(記錄)되어 있고, 또 근래에 가회 장대(佳會 將臺)에서 가마터와 유물(遺物)이 발굴(發掘)되어 기록(記錄)이 사실(事實)로 확인(確認)되었다고 하여 가수현(嘉樹縣)의 서쪽 즉 봉성(鳳城; 현재의 삼가三嘉)의 서쪽임으로 가수(嘉壽)와 봉성(鳳城)은 동일장소(同一場所)라고 하는 바, 이는 큰 오류(誤謬)를 범(犯)하는 해석(解釋)이다. 앞에서 설명(說明)한 바와 같이 가수(嘉壽)나 봉성(鳳城)은 삼가현(三嘉縣)의 이칭(異稱)임으로 현(縣)의 관할구역(管轄區域)인 대병(大幷). 가회(佳會), 쌍백(雙柏), 삼가(三嘉), 신원(神院) 등 현縣의 전체영역(全體領域)을 아우르는 넓은 전체지역(全體地域)의 서(西)쪽이라는 뜻이다. 가덕도 신공항(加德島 新空港)의 위치(位置)를 말할 때 부산(釜山)에서 보면 서(西)쪽이지만 우리나라 전체(全體)에서 보아 동남(東南)쪽 신공항(新空港)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삼가사적비(三嘉史蹟碑)의 내용(內容)에 한 자도 빼고 더할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分明)히 밝히는 바이다. 향후(向後) 이와 유사(類似)한 이론(異論)이 있어도 다시는 붓을 잡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