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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애국지사 순국 기념비’를 건립하게 된 경위와 사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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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의 앞면과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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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탑과 건물(도서관) 사이 순국 기념비가 보인다.

지난달 23일(수) 합천군 삼가면 양천강변길 59 삼가장터 3·1광장에서, 경남서부보훈지청 박영준 보훈과장과, 순국 애국지사 후손인 박순호(삼가시장식당 대표)씨, 박명식(전 창원남부농협 지점장)씨, 최상호(전 남명선생 선양회장)씨와 삼가장터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진택현 선생의 외손자인 한판수씨, 조찬용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회장 등이 참석하여 조촐하게 제막 고유제를 했다. 비문은 3·1만세시위가 삼가 등 경상우도에서 격렬하게 일어나게 된 그 역사적 연원을 밝히고, 합천 등 경상우도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알 수 있도록 지었다. 각주는 이해를 돕기 위해 조찬용 회장이 달았다.
본사는 지난 25일(월) 조찬용 회장과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항일 애국지사 순국 기념비’를 건립하게 된 경위와 사유, 비문에 대한 설명, 애국지사 사료 발굴, 3·1절 통합행사 등에 관한 그의 견해를 들어 보았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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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애국지사 순국 기념비’를 건립하게 된 경위와 사유는?
광복 일주갑인 2005년 8월 15일 7개면 주민들이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을 건립한 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이상현, 권영규, 최용락 선생 등 아홉 분의 애국지사가 서훈됐다. 그런데 2009년 6월 이상현 선생의 손자인 이근홍(미국 버지니아 거주)씨가 귀국하여 350만원을 선뜩 쾌척(快擲)함에 따라, 아홉 분을 기념탑에 추가로 새겨 넣었다.
2015년,16년에 또 추가로 세 분의 애국지사가 서훈이 돼서 이를 기념·기억하는 게 당연한 책무라고 생각하여, 국가보훈처에 예산신청을 했다. 다행히 605만원이 내려와서 별도 기념비를 삼가장터 3·1광장에 건립하게 됐는데, 기존 3·1탑문에 애국지사 이름이 들어갈 공간이 없어서 이렇게 건립하게 된 것이다.

조찬용 회장이 1,500자 정도가 되는 짧지 않은 비문을 지었다. 비문을 읽어보니까 합천의 정체성, 나아가 경상우도(경남)의 정체성과 항일정신의 연원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나와 있다. 설명해 달라.
우리 합천을 비롯한 경상우도에서 정미의병전쟁과 3·1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것은,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이 일관되게 주창한 “대권을 가지고 있는 백성이 주인이다”고 하는 민본사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1555년 을묘왜변과 1592년 임진왜란, 1908년 ‘삼가의병단’의 의병전쟁, 1919년 삼가장터 등 합천지역의 3·1운동이 그 맥(脈)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비문에 이를 넣은 것이다.
‘합천정신, 합천 및 경남(경상우도)의 정체성’은, “국민이 주인인 민본사상, 기절(氣節)을 숭상하고 대의(大義)에 앞장서는 남명 및 내암정신, 그리고 자주·독립정신”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그동안 조 회장이 사료를 발굴하여 서훈이 된 애국지사가 9명이라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채 안 됐는데도 제대로 된 사료(史料)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순국자에 관한 사료는 거의 찾기가 어렵고, 옥고를 치른 분의 재판기록도 1949년 진주법원이 좌익에 의해 소실될 때 관련 자료들도 없어져 버려 입증하기가 어렵다. 그동안 11명을 서훈신청 했는데, 이상현, 권영규, 진택현, 한필동, 배숙원, 박병규, 최도인(이상 삼가 3·1) 선생과, 대병 3·1의 정태섭 선생과 초계 3·1의 전영우 선생 등 아홉 분이다. 현재 애국지사 후손들에게 매월 유족보상금이 지급되고 있는데, 국격(國格)에 걸맞게 금액 인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매년 열리는 삼가장터 3·1절 행사와, 격년제로 열리는 합천읍 3·1절 행사를 통합하여 개최해야 한다는 여론이 없지 않다. 조 회장의 견해는?
하나로 통합하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격렬하게 일본에 맞선 합천의 3·1정신을 기념·계승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임에 틀림없다. 다만, 주민들이 기획 및 주관하여 건립한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앞에서, 매년 기념·추모제가 개최돼야 한다는 조건에 동의할 때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첫째, 2005년 8월 15일 7개면 주민들의 모음 1억5,000만원 등 6억5,400만원으로 3·1 기념탑을 건립했다는 전무후무한 사례다.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에서 전국에 공개공모를 한 후, 글: 권인호 대진대 교수, 조각: 류경원 충북대 교수, 그림: 이두호 세종대 교수가 최종 결정돼 건립했다.
둘째, 우리 합천지역에서 최초로 3월 18일(음력 2월 17일 삼가장날) 삼가장터에서 일어났다는 역사적 상징성이다. 장소 및 공간적 의미의 중요성과 그 역사적 상징성은 보전되고 계승돼야 하지 않겠는가.
셋째, 삼가장터 3·1만세운동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격렬하게 일어난 전국 최대의 만세시위라는 차별성이다.
1919년 9월 안창호의 상해임시정부 발간 ‘한일관계사료집’에 삼가장터 3·1운동 때 3만여 명 참여, 순국 42명, 중상 100여 명으로 나와 있고, 1936년 경남경찰부 발간 ‘고등경찰관계적록’에 1만여 명 참여하여, 폭민측 사망 5명, 부상 20명, 체포 38명으로, “가장 악질이다”고 수록돼 있다. 이런 사유 등으로 삼가장터 만세운동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 3부에 유일하게 나와 있다.
그러므로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앞에서, 애국지사 후손들이 주인공으로, 내빈으로 참석하여 3·1절 기념·추모제가 매년 열려야 하는 것이다.

 

2016년 3월 23일 순국 97주기를 기억하며
조찬용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 지음

항일 애국지사 순국 기념비 전문

(앞면)
항일 애국지사 순국 기념비
배숙원(裵淑元, 1875∼1919, 건국훈장 애국장)
이낙현(李洛鉉, 1860∼1919, 건국훈장 애국장)
최도인(崔道仁, 1868∼1919, 건국훈장 애국장)
박종생(朴鍾生, 1884∼1919, 쌍백면 백역리 출생)
※삼가장터 3·1만세운동과 관련하여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서훈한 애국지사는 19명인데, 건국훈장 애국장(순국자) 10명, 애족장 등 9명이다.

(뒷면)
백악산(白岳山) 아래 3·1광장에 이 비(碑)를 세운 것은, 2005년 8월 15일 6억5,400만 원(주민모금 1억5,000만, 국비 1억1,400만, 도비 3억3,000만, 군비 6,000만)으로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등을 건립한 후, 새롭게 확인된 네 분의 애국지사를 기리기 위해서다.
배숙원 이낙현 최도인 박종생 애국지사는 2차 삼가장터 만세운동 때 공재규 등 3만여 명의 군중과 함께 일본 경찰과 헌병의 총칼에 맞서 독립시위를 하다 순국했다. 이때가 1919년 기미년 음력 2월 22일(3월 23일) 삼가장날이었다.
이곳 삼가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이 민암부(民巖賦)에서 “대권(大權)을 가지고 있는 백성이 주인이다”고 주창한 남명의 민본사상과 기절(氣節)을 숭상(崇尙)하는 남명 정신이 서려 있는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중심지였다. 3·1만세운동 때 삼가 대병 대양 초계 묘산 단성 진주 군북 우곡(고령) 등 경상우도에서 격렬하게 일본에 맞선 것은, 1555년(명종10) 왜구가 을묘왜변을 일으켜 노략질을 일삼자 남명이 철저하게 응징하라고 한 것과, 1592년 임진왜란 때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1536∼1623) 등 남명 문인들이 대거 창의(倡義)하여 국난을 극복한 사실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의병투쟁으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왜적으로부터 지켰다.
합천 출생인 영의정 정인홍이 1623년 서인들에 의한 이른바 인조반정 때 그 흔한 심문조서조차 남겨두지 않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1694년 갑술환국갑술년인 1694년(숙종20)에 시국이 바뀌는 갑술환국과 1728년 무신봉기(戊申蜂起)를 거치면서 경상우도는 서인(노론)들로부터 반역향(反逆鄕)으로 매도돼 가혹한 차별을 받았다.
집권세력인 서인(노론)들의 부패·독재와 기득권층의 의무불이행이 만연하여 전쟁이 아닌 조약(條約)으로 나라가 망했지만, 배숙원 등 경상우도인은 기개와 절조(節操)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앞장서 싸웠다. 400여 년 전 남명과 내암이 일본의 침략성을 간파하고 단호하게 대처한 것처럼 행동으로 실천했다. ‘항일 정신은 남명 및 내암 정신’이기에….
덧붙여, 2005년 주민들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합천군과 군의회에서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건립비 1억5,000만 원을 삭감했지만, 주민들이 애국심과 애향심으로 뭉쳐 기념탑 건립을 완료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예산삭감 관련 합천군의회 회의록→제121회 합천군의회 내무위원회(2005.5.9) 및 예산결산특별위원회(2005.5.10, 5.11), 제125회 내무위원회(2005.9.12) 및 예산결산특별위원회(2005.9.13)]

01)공재규(72세, 애국장), 김기범(58세, 애국장), 박선칠(44세, 애국장), 윤성현(18세, 애국장), 이상현(34세, 애국장), 권영규(55세, 애국장), 박병규(41세, 애국장), 배숙원(45세, 애국장), 이낙현(60세, 애국장), 최도인(52세, 애국장) 등 10명임. 박종생(36세) 등은 순국한 게 맞지만, 증빙자료 부족으로 서훈이 안 되고 있음.

02)이계엽(33세, 애족장), 오영근(31세, 애족장), 정방직(29세, 애족장), 윤규현(26세, 애족장), 최용락(25세, 건국포장), 정각규(31세, 대통령표창), 공민호(40세, 대통령표창), 한필동(32세, 대통령표창), 진택현(39세, 대통령표창) 등 9명임. 정희영(35세), 임종봉(32세), 이원영(33세), 윤재현(33세, 사돈: 이현상 남부군 대장), 이상동(38세) 등은 증빙자료 부족으로 서훈이 안 되고 있음.

03)국토교통부 산하 국토지리원에서 백악산(268m)으로 명명(命名)되어 있음. ‘백악(白岳)’은 “밝고, 장대하고, 신령스럽다”는 뜻으로, 단군왕검의 아사달과 이성계의 한양의 주산이 모두 ‘백악산(북악산)’임.

04)한일관계사료집(임시정부, 안창호•이광수, 1919년 9월), 이 사료집에 3만여 명이 참여하여, 순국 42명, 중상 100여 명으로 나와 있으며, 이런 사유 등으로 삼가장터 만세시위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 3부에 유일하게 나와 있음.

05) 조선소요사건상황(조선헌병사령부, 1919년 8월)

06)남명집 권1 민암부

07)명종실록 10년 11월 19일, 명종실록 15년 7월 3일, 명종실록 21년 10월 7일, 선조실록 즉위년 11월 17일, 선조실록 6년 11월 30일, 선조실록 35년 9월 25일, 선조실록 40년 5월 15일, 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16일, 광해군일기 즉위년 11월 12일, 광해군일기 2년 3월 21일, 광해군일기 10년 5월 13일, 영조실록 13년 7월 1일, 영조실록 16년 12월 5일, 영조실록 28년 8월 20일, 정조실록 20년 8월 13일
이러한 기절(氣節: 기개·절개·지조)을 숭상하는 남명 정신은, 1592년 임진왜란 뿐만 아니라 1908년 정미의병전쟁 때도 빛을 발함. 1908년 박수길 김팔용 이차봉·소봉(산포수) 김화숙·찬숙 한치문 김우옥 김응오 장명언 성만석 심낙준 이두익 전성구 김상래 등이 ‘삼가의병단(三嘉義兵團)’을 조직하여 주재소 습격과 군자금 모집 등 항일 독립투쟁을 하다가 14명(애국장)이 순국하고 8명(애족장)이 옥고를 치름.→ 1919년 3·1만세운동 때 삼가 대양 초계 대병 군북 단성 진주 고령 등지에서 격렬하게 만세시위가 일어남.

08)1554년(명종10) 을묘년 5월에 왜구가 영암·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고, 전라병사 원적(元積)과 장흥부사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은 왜구에게 사로잡힘.

09)정인홍 의병부대의 본진(本陣)이 해인사 인근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 이연서원(伊淵書院) 앞 주학정(住鶴亭)에 있었던 관계로,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을 보전하게 됨. 임진왜란으로 통도사 송광사 범어사 불국사 법주사 쌍계사 칠불사 화엄사 연곡사 실상사 내장사 선운사 낙산사 등 유명 사찰이 왜군(일본)에게 약탈당한 후 소실됐으나, 해인사는 온전하게 보전됨

10)(甲戌換局)으로 권대운 이현일 이의징 민암 목내선 유명현 김원섭 등 남인이 완전히 정권에서 배제되고, 왕비인 장씨를 희빈(후궁)으로 강등시킨 후 인현왕후가 복위됨으로써, 김창집 이이명 서문중 남구만 박세채 등 서인 분파인 노론 대부분과 소론 일부가 집권하게 됨. 경상도 남인, 특히 우도 남인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권력에서 소외됨. (甲戌換局)으로 권대운 이현일 이의징 민암 목내선 유명현 김원섭 등 남인이 완전히 정권에서 배제되고, 왕비인 장씨를 희빈(후궁)으로 강등시킨 후 인현왕후가 복위됨으로써, 김창집 이이명 서문중 남구만 박세채 등 서인 분파인 노론 대부분과 소론 일부가 집권하게 됨. 경상도 남인, 특히 우도 남인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권력에서 소외됨.

11)이른바 무신란(戊申亂) 또는 이인좌의 난으로 불림. 1728년 영조4년 무신년(戊申年) 3월 15일부터 4월 3일까지 18일 동안, 거창 함양 합천 상주 문경 천안 청주 진천 음성 보은 옥천 안성 평택 정읍 부안 임실 순창 나주 춘천 원주 서울 평양 경흥 등 나라의 반쪽이 가담하여 나라가 전복될뻔한 무장봉기를 말함. 경상우도 남인에 대한 차별과 소외 등을 타파하기 위해 일어난 무신봉기로 합천 삼가 진주 거창 함양 고령 등 경상우도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가혹한 차별을 받게 됨. 1994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무신봉기에 대해 “정치체계와 권력구조의 모순에 의해 일어난 의리명분 논쟁의 한 양상이면서 동시에 대규모적인 권력투쟁의 표출이며, 소외계층의 변혁운동이다”라고 평가함.

12)광해군일기 2년 3월 21일, 영조실록 9년 2월 25일, 승정원일기 및 영조실록 13년 3월 3일, 영조실록 13년 7월 1일, 영조실록 16년 12월 5일, 평영남비 비문(1780년 정조4년 11월 건립)

13)일본과 전투나 전쟁도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망한 것을 말함.

14)앞 각주 7)과 같음.

15)삼일운동 시 피살자 명부(대한민국 정부, 1953년)에 3·1만세운동 때 일제에 의해 피살된 645명 중, 합천 지역이 가장 많이 피살됐는데 무려 40명이나 됨. 삼가장터 3·1운동 21명, 초계 3·1운동 10명, 대양 3·1운동 9명임. 남명학파의 근거지인 경남이 전체의 29%(184명)이고, 경기가 26%(169명), 아우내장터 등 충남 11%(71명), 이황 및 유성룡의 고향인 경북은 7%(43명), 충북 5%(34명), 강원 4%(29명), 전남 4%(28명) 등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