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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 찾기 (2)| 조선왕조 수도 한양을 터잡은 풍수가 무학

​(특집기획: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인한 쇠퇴해져 가는 지역을 살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풍성한 ‘문화(文化)’라는 자산을 잘 간직하고 빛내는 것이라 본다. 
특히 우리 지역이 배출한 인물을 연구하고 창달하는 것은 지역민의 사기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지역의 문화콘텐츠나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런 방향에서 합천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무학대사는 조선의 기틀을 세우는 등 조선조 최고의 고승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며, 민간에서 민중들에게 큰 인기를 받았던 만큼 관련된 많은 설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인물이다. 이런 위인이 태어난 합천임에도 지역에서 관련 유적을 고증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미진했다. 그러다 보니 근래엔 대사의 출생지를 합천이 아닌 충난 서산시라 주장하며 기념비를 세우는 등 출생지 논란이 있기까지 했다. 이에 무학대사와 관련된 지역의 유적을 밝혀내고, 무학대사가 합천의 인물로 배출되어 훌륭한 업적을 남긴 그 전모를 밝혀내고자 한다.)

무학 대사가 합천군 삼기현(현재 합천군 대병면) 출신인 것은 두 번 거론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차고 넘치는 역사적 사실들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헌 중에는 <조선왕조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삼기현을 왕사 자초(무학대사)의 고향이기에 승격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왕사·국사 제도에서 왕사가 퇴임할 때, 연고지를 승격시켜주거나 왕이 보내는 선물을 제외하고 만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산소를 지정해 주었다.(대표적인 하산소로는 일연 스님이 머문 군위군 인각사, 적연 국사의 합천군 영암사, 회암사 등이 있고 하산소에는 대사들의 일생을 기록한 비를 세웠다.) 무학대사의 하산소는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회암사이지만, 무학대사의 고향인 대병면 일대에 폐사지와 탑지가 발굴되고 있어, 이 역시 무학대사가 고향에 세운 절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함께 무학대사와 관련한 아주 다양한 전설과 설화들이 내려온다. 지금도 대병면에서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승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 역시 무학대사가 합천에 태어났다는 증거이다.

무학대사의 일대기와 활약

무학대사의 법명은 자초(自超), 속성은 박(朴)씨이며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삼기현(三岐縣)에서 출생하였다.(오늘날 합천군 대병면) 무학대사의 일대기를 간단히 나열해 본다.
▲1327년(고려 충숙왕14년) 9월20일 출생. 아버지 박인일(朴仁一)과 어머니 고성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태몽에 태양이 품안에 미치는 꿈을 꾸고 잉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344년(충혜왕5) 18세.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18세에 출가한다.
▲1346년 20세. 능엄경을 보다 깨우침을 얻다. 그때부터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 묘향산 금강굴 등에 머물면서 불도를 닦았다.
▲1353년(공민왕2) 27세. 원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원나라 연도(燕都)로 가서 인도 승려 지공(志空)을 만나 도를 인정받았고, 이듬해 법천사(法泉寺)에서 나옹(懶翁)을 만난 뒤, 무령(霧靈)·오대산 등을 거쳐 서산(西山)의 영암사(靈巖寺)로 나옹을 다시 찾아가서 수도하였다. 나옹에게 깨달음을 인정받은 후, 1356년(공민왕5) 고려로 돌아온다.
▲1359년 33세. 원효암에 있던 나옹을 찾아가자, 나옹은 법을 전하는 표시로 불자(拂子)를 주었다. 그 뒤 나옹이 옮겨가 있던 신광사(神光寺)로 찾아갔다가, 대중 속에 자신을 거리끼는 사람이 있음을 보고 고달산(高達山)에 들어갔다.
▲1371년 45세. 나옹이 왕사(王師)로 책봉되어 송광사에 머물면서 그에게 의발(衣鉢)을 전하였다.
▲1376년(우왕2) 50세. 회암사(檜巖寺)를 크게 중창한 나옹이 그를 수좌로 삼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 같은 해 나옹이 입적하자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면서, 공양왕이 왕사로 삼고자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1392년(태조1) 66세.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무학 대사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았다.
▲1393년(태조2) 67세. 왕도(王都)를 옮기려는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 등을 돌아다니며 풍수지리를 보고, 마침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 데 찬성하였다. 1393년 9월에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였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불사(佛事)를 광명사(廣明寺)에서 베풀었으며, 10월에는 국가의 주관 아래 대장경을 읽는 전장불사(轉藏佛事)가 연복사(演福寺)에서 개최되었을 때 그 주석(主席)이 되었다.
▲1397년(태조6) 71세. 태조의 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웠다.
▲1398년(정종1) 72세. 용문사(龍門寺)에 머물렀다.(제1차 왕자의 난)
▲1400년(태종1) 74세. 제2차 왕자의 난 일어남. 정종이 방원(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줌.
▲1402년(태종3) 76세.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그해 태종 이방원의 청을 받아 함주(함흥)에 머물고 있는 태상왕 이성계를 설득하여 한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405년(태종6) 79세. 금강암에서 나이78세, 법랍62세로 입적.
대표적인 제자로는 기화(己和)가 있다. 저서로는 <인공음(印空吟)> 1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으며, <무학대사어록(無學大師語錄)> 1권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무학비결(無學秘訣)>이라는 필사본이 있으나, 그에게 가탁된 위서(僞書)라는 설이 있다. 현존하는 저서로는 전라남도 순천송광사에 소장되어 있는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가 있다.
*<불조종파지도>는 불교 선종(禪宗)의 종파에 따른 법맥(法脈)을 도표로 기록한 책으로, 석가 이전에서부터 우리 나라 나옹(懶翁) 선사로 이어지는 법맥을 기록했다. 첫 장에는 과거칠불-서천(인도)28조-동토(중국) 6조가 나와 있고, 마지막 장 끝 부분에는 묘엄무학선사(妙嚴無學禪師)까지 나와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자문역할을 한 무학대사

고려말 조선초의 뛰어난 선사였던 무학대사가 대중들에게 가장 크게 각인이 된 사건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도와 한양에 새 도읍지를 정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 두 가지가 있다. 이성계의 명을 받아 한양에서 터를 보던 중 밭에서 소를 끌고 쟁기질을 하던 농부가 “이 무학이처럼 미련한 소야, 십리를 남겨놓고 여기서 자리를 잡으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소리를 듣고 십리를 더 가서 터를 잡게 되는 데 이곳을 ‘왕십리(往十里)’라고 부른다.
또 다른 이야기 역시, 무학이 한양에서 터를 살피던 이야기이다. 무학이 백운대에서 만경대에 이르러 서남쪽으로 가니 신라 고승 도선(道詵)국사가 세운 비석 하나가 있다. 거기에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라고 적혀있다. 뜻은 ‘무학이 잘못 찾아 이 곳에 이를 것이다’라는 예언이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아주 그럴듯한 이야기로 대중들에게 자주 오르내리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는 맞지 않다. 이미 고려 전에 왕십리가 아닌 왕심(旺心)이란 명칭이 있었다.[목은시고(牧隱詩藁)] 또한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 역시 도선 국사가 세운 비가 아니라 진흥왕순수비라고 추사 김정희 선생이 일찍이 고증을 한 바가 있다.[완당전집]
설화와 달리 현존하는 기록 중 무학대사와 한양천도(漢陽遷都)와 관련된 기록은 <태조실록(太祖實錄)>에 간략하게 나온다.
그 중 1394년(태조3년)8월13일. 고려 ‘남경(南京)’ 옛 궁궐터를 보고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게 되면서 무학 대사에게 의견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왕사 무학은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한양천도와 관련한 직접적 진술은 이 두마디 말이 전부이다.
앞부분의 말,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탄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만 합니다.”라는 말은 합당하다는 의중을 표현한 것이다. 뒷부분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라는 말은 태조 독단으로 결정하는 모양새를 취하여 정치적 부담을 지지 말고 절차를 밟으라는 마땅한 자문 의견을 진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무학대사의 말은 직설적이거나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는 화법이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신유학을 전면에 내세우는 조선 개창 초기 관료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처지라고 볼 수도 있다.(홍순민 명지대 교수 의견)
하지만 오히려 화해와 합의를 중요시하는 종교인으로서 당연하지만 중요한 답변이라고 생각이 든다. 세상사를 떠난 출가 종교인으로서 아무리 합당한 의견이라고 할지라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조율하고 화합된 상태에서 진행을 하라는 말은 짧지만 깊은 혜안이 깃든 충고라는 생각이 든다.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였던 무학대사

태조 이성계는 무학 대사에 대한 큰 신뢰를 갖고 존경심을 품었던 인물이다.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회암사에 머물 때 술과 육식을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무인 계급의 파란만장한 사람을 살았던 태조 이성계가 “왕사의 말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 후생에 반드시 머리없는 벌레가 된다고 하기에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태종실록.태종2년8월2일)라며 말년에 불교에 귀의해 크게 감화된 모습의 태조를 엿볼 수 있다. 무학 대사는 태조 이성계가 정치를 물러나 한 인간으로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또 무학대사는 임금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유교에서는 인이라고 말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말하지만, 그 쓰임은 한 가지입니다. 백성을 보호하기를 갓난아기 (보호함과) 같이 한다면, 곧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지극히 어진 마음과 크게 자비한 마음으로 나라에 임한다면 자연히 임금의 수명은 끝이 없고 자손들은 길이 장성하여 사직이 편안할 것입니다. 지금 개국초기이어서 형법에 빠진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모두 용서하셔서 모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인수(仁壽: 인덕이 있고 명이 김)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 국가의 무궁한 복인 것입니다.”(변계량, 묘엄존자탑명에서)
무학은 임금에게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이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백성을 갓난아기처럼 보호하라고 했다. 이런 애민정신으로 정치를 할 때 나라가 평안하고 길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조선 건국 혼란기에 형법에 빠진 자들을 풀어주기를 권면한 것이다.

태조가 물러난 이후의 무학의 수난

무학의 활동이 태조의 후원에 의한 것이었던 만큼 태조가 왕위를 물러난 뒤로 무학의 활약도 눈에 띄게 줄었다. 심지어 1405년(태종5) 입적했을 때에는 사간원에서 무학을 비난하면서 법호와 부도, 비를 세우게 한 것을 철회하라거나, 그 죄상을 국문하여 논죄하고 탑묘를 헐어버리고 그 해골을 흩어버리라고 상언했을 정도였다. 무학대사 사후에는 그에 대한 평가가 더욱 악화되었는데, 1414년(태종14년)에 태종과 신하들이 편전에서 대화하는 가운데, 무학대사를 헐뜯는 내용도 나온다.
*태종이 “불씨의 도는 그 내력이 오래 되니 나는 헐뜯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으려 하나 그 도를 다하는 사람이면 나는 마땅히 존경하여 섬기겠다. 지난날에 승 자초는 사람들이 모두 숭앙하였으나 끝내 득도한 징험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나는 노상의 행인과 같이 본다. 만약 지공이라면 어찌 존경하여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군신들은 모두 “옳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태종실록 권27.태종14년6월20일)
조선초기 무학대사의 입적 후 그 그늘이 지기도 전에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조선전기 내내 무학의 이름은 기록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외에도 무학대사의 삶에 대해 가장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비(楊州 檜巖寺址 無學大師碑)일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지에 있으며 태종의 명으로 건립된 무학대사비는 무학대사의 행장을 토대로 비문을 지어 해서체로 새겼다. 조선 태종10년(1410년)에 왕명에 따라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공부(孔俯)의 글씨로 세워졌었다.
그런데 1821년(순조 21년) 봄에 이응준(李膺峻)이라는 선비가 회암사 삼화상[三和尙 :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의 비와 부도를 제거하고 선친의 유해를 안장하면 대길하다는 술사(術士) 조대진(趙大鎭)의 말을 듣고 회암사지 북쪽 언덕에 있던 지공의 부도와 무학대사비를 헐고 그 자리에 선친을 투장(偸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태종이 세운 비를 훼손했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어 소란을 일으킨 이들은 귀양을 보내고, 1828년(순조25)에 다시 세웠다. 다행히 비문의 훼손은 심하지 않아, 1828년(순조 28년)에 새로 만들어 세웠다.

풍수가로 다시 나타난 무학 대사

이후 태종까지 나타나던 무학에 대한 기록이 거의 200년 가까이 나타나지 않다가 선조대부터 간간이 무학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무학이 지었다는 <도참기>가 실록에서 언급이 되고(선조실록.선조25년4월30일) ‘신승(神僧)’으로 묘사가 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민간에서 무학과 관련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지만, 그렇다면 조선 후기에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밝히는 것이 오히려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왜 무학이 조선후기에 민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을까?
특히 200년 넘게 지난 뒤에 편찬된 선조실록 및 선조수정실록의 기사는 신빙성에 큰 의문을 갖게 한다. 도참기 라는 글이 무학대사가 지은 글이라고 인정할 근거가 매우 미약하다.(선조25년.1592년4월30일 기사)
풍수지리학과 도참설과의 무학대사와의 관계에 대해 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임진왜란 이후 고달픈 현실에 대한 당대인의 근거가 미약한 환상적 해답 모색의 결과”라고 견해를 피력했다. 당시 임진왜란 당시 의승장이었던 사명대사가 민간의 전승(임진록 등)에서 신이함이 부각되며 영웅화되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음을 지적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무학대사는 한양을 천도하는 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데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야기로 남아 오늘날가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무학대사에 대한 왕십리 이야기는 무학대사가 모자란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친숙하고 도와주고 싶을 정도의 열성을 지닌 호감형의 인물로 받아들여진 것이라 보여진다.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사상. 조선이 건국하여 오랜 기간 백성들을 사랑하는 나라로 이어지기 원하는 마음이 깃든 것이다.
다음호는 더 깊이 무학대사의 사상과 위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박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