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서원(회산서원) 창건 위치는 ‘가회면 장대’이다 – 허종홍 가회면지 편찬위원장


가회면에서는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지역의 역사와 민속, 그리고 인물들을 발굴하여 2021년에 가회면지를 발간하기로 뜻을 모아 추진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성원이 있기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지역 명칭이나 유적지에 관하여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여 혼란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용암서원은 1576년 노흠(盧欽), 송희창(宋希昌) 등 여러 선비들이 의논하여 삼가현 서쪽 20리 남짓 회현(晦峴)에 회산서원(晦山書院)을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지역 일부 인사들이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가회면지편찬위원회’에서는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는 자료를 검토하여 일반에 공개하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회산서원의 위치는 현재 ‘가회면 장대’입니다. 우리가 보관하고 있는<1872년 제작 ‘경상도지방지도 삼가현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 1999.12)>와 <1800년대 초, 허견(許梘)의 영탄정사도(潁灘精舍圖)>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영탄정사도는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료입니다.
다음은 지금까지 있었던 지적사항에 대한 요약과 그에 대한 편찬위원회 입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 서원 창건에 관여한 사람이 가회인(佳會人)은 없으며, 장대(가회)는 삼가 치소에서 40리나 되고 사우실(가회)은 20리로 유생들의 출입이 장대는 먼 곳으로 불편하여 부적합하다는 지적에 대해.
▶(설명):서원 창건은 노흠(대병장단), 송희창(대병) 외에 남명선생 문집에 가회인으로 만헌(晩軒) 허팽령(許彭齡)이 창건자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서원 건립지 장대(감한면 소재지)는 당시 삼가현 20개 면에서 현내, 백질동, 상곡, 아곡, 문송면을 제외하면 15개 면이 치소의 서북부에 위치하여 감한면(장대)과 가깝고, 인근에 있는 산청현, 안음현, 단성현, 거창현 등에서 접근성이 좋다. 그리고 사우실(감한면)도 치소에서 가깝지만, 1872년 지도에 감한면(장대)까지 20리로 기록하고 있다. 서원 위치와 배향 인물의 고향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은 전국에 있는 서원을 보면 알 수 있으며, 1601년 회산서원 중건 때는 삼가에서 70리 되는 향강 옆 계산(삼가현)으로 옮긴 것은 고향이나 출생지와 거리는 상관없음을 알 수 있다. - 회현(晦峴,-그믐재), 회령(晦嶺,-그믐재)의 위치를 망현(網峴), 화지현(花旨峴)과 같은 곳이라는 해석에 대해.
▶(설명):보관 중인 ‘경상도지방지도(1872)’에는 회현(晦峴)은 현재 위치이며 ‘영탄정사도’에 회령(晦嶺)의 위치가 현재 그믐재와 같다. 그 외에도 장대 거주 김해 허씨와 김해 김씨 집안의 1800년대 묘소를 쓴 위치(현, 그믐재)가 회령(晦嶺)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망현(網峴)과 화지현은 회현과 다른 곳이다. 예전에 삼가에서 대평, 고현, 병목 가는 큰길은 삼가에서 하판, 지동을 거쳐 삼리(三巨里)에서 웅동(深谷)로 넘어간다. 이 고개를 화지현(花旨峴-삼리에서 웅동 가는 고개)으로 여러 지도에 표기되어 있고, 1700년대 은진 임씨 묘소를 쓴 위치(현, 웅동 주변)가 화지현(花旨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현과 망현, 화지현은 다른 곳이다. - 가회면 사우실이 현재 행정명 내사(內沙)가 된 것은 일제 때이며 젊은 향토사학자의 착오와 남명 선생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생긴 이름이란 주장에 대해.
▶(설명):현재 사우실 마을은 ‘사오실, 사호실’이라고 발음하기도 하며 어떤 기록에도 사우실이 한자로 사우실(祠宇室)로 기록된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현재 행정명으로는 가회면 외사리(外沙里), 내사(內沙) 마을이다. 조선시대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감한면에 장대, 다공, 비기, 사기소리(沙器所里)라는 지명이 나온다.
그리고 1872년 발간된 경상도지방지도(삼가현)에 외사(外沙), 내사(內沙) 위치가 현재 위치와 일치하며 외사와 내사 중간에 회현(晦峴)이 현재 위치에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내사 지명은 1872년 이전에 있었던 이름으로 일제와도 무관하다. - 사우실 거주하는 김찬호 씨가 30여 년 전 비개석(碑蓋石)과 말 마(馬) 자와 아래 하(下)자가 쓰인 비석을 보았다는 증언을 참고로 하마비(下馬碑)로 확신하고 회산서원 터의 증거로 주장한 것에 대해.
▶(설명):사우실 김찬호 씨를 9월22일 오후1시에 가회면지편찬위 관계자와 만났다. 위와 같이 비개석과 비석의 글이 마(馬)자, 하(下)자를 기억한다고 하면서 그외 ‘오를 승(昇)’자도 기억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하마비(下馬碑)는 비개석이 거의 없으며 오를 승(昇)자가 들어가는 경우가 없다. 현재 마을 원로의 의견은 ‘서원(사우, 祠宇)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 - 그외 여러 자료를 제시하며 안 사우실(內沙, 내사)을 반복적으로 회산서원 터로 주장한 것에 대해.
▶(설명):우리는 회산서원이 회산(晦山)아래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1872년 발간된 ‘경상도지방지도’에서 외사, 내사 사이에 회현이 있고, 회현 아래 장대가 현재의 위치에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으므로 장대가 회산서원 터로 보고 있다. 또한 처음으로 공개하는 <『영탄잡지(潁灘雜志)』에 영탄정사도(潁灘精舍圖) 있음>는 정재 유치명 선생이 후기를 쓴 책으로 그림 지도에 <장대(將坮) 남명조선생타령지(南冥曺先生妥靈址-남명조선생 신주를 섬겨모심)>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장대 주민들은 지금도 마을 앞(벼랑 위)을 서원터라고 부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회산서원은 가회면 장대에 있었다는 자료를 위와 같이 제시하면서 시중의 의견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2017년 발간 용암서원지(龍巖書院誌, 김경수 저) 32쪽 주석3)과 237쪽 삼가 전교의 발문에 회산서원 터가 외사리(外沙里), 내사(內沙,사우실)에 있었다는 기록은 잘못으로 정정되어야 한다.
※첨부: 1.영탄정사도(潁灘精舍圖) 2.삼가현 감암면 지도(더 자세한 내역이나 지도를 알고자 하시는 분들은 편찬위로 문의바랍니다.930-4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