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쟁諫爭 가수현청(嘉樹縣廳)의 역사 (2) – 월허전호병 합천군향토사 연구회 회원
간쟁(諫爭)이란 과거시험(科擧試驗)의 답안(答案)이나 친구 사이의 책선(責善)까지도 간쟁에 속하는데. 예부터 간쟁은 아름다운 일이며 배척받아야 하는 일은 아닙니다. 다만 당파싸움에 상대를 꺼꾸러뜨리거나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식의 이전투구에 악용되기도 했지만 간쟁의 본질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20년12월3일자 합천신문에 선배님께서 저의 간쟁(諫爭)의 글에 답하시면서 제목과 서두에만 남명선생에 관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내용 중에 제가 신문에 게재한 자체를 적절치 못하다는 의미로 아래와 같이 지적하셨습니다.
“본인에게 대하여 그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고 신문에 게재하는 것은 적절치 못함으로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언론기관에 분별없이 간쟁(諫爭)이라는 용어로 기사화(記事化) 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셨는데 제가 합천신문에 기고하게 된 사연의 전말(顚末)과 선배님의 대답에 좀더 상세하게 답(答)하겠습니다.
2015년 4월에 합천문화원 부속 합천군향토사연구소 회원이 되어, 향토사연구소 회의 시에 삼가기양루(三嘉岐陽樓) 현장조사를 제의하여 2015년 늦가을에 하였는데, 문화원장님께서 최상호 선배님을 초청하셨습니다. 기양루 현장조사 이튿날 아침에 선배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자네의 설명과 준비한 자료의 내용이 모두가 옳더라. 앞으로 좋은 향토사학자가 되라.” 는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황송한 마음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선배님께서 기고한 2016년 5월 25일자 「삼가향교 연혁」, 2017년 1월 19일자 「기양루의 루명과 용도에 관한 소고」(1), (2)를 2017년 2월 하순에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기양루 루명과 용도에 관한 소고(1) 의 첫머리에
“요즈음 기양루(岐陽樓)의 루명(樓名)에 대하여 사리에 맞지 않는 해석이 있어서 바로 잡고자 한다.” 로 시작을 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자네의 설명이 모두 옳더라는 격려의 말씀을 하셨기에 참으로 어리둥절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2006년에 내문 출신의 안경상(安慶相)선생께서 “김연 문화원장 재직 시에 안내문을 바로 잡아 달라는 건의문을 제출하였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고 하시며 오류가 많은 안내문을 바로잡아 달라는 부탁의 말씀을 하시고 편지도 보내주셨습니다. 그 이전부터 인식하고 있던 문제라 망설임 없이 그러겠다는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 후로 10여년이 지난 2014년부터 기양루와 향교(鄕校)의 풍화루(風化樓)에도 여러번 살펴보고 기양루의 2층 마루에 올라 중수기(重修記) 2편을 사진으로 찍어서 국역(國譯)도 하였고 나름 기양루와 삼가현청을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연유와 삼가현의 역사가 왜곡됨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꿈에도 생각지 못한 합천신문 기고를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2020년 12월 3일자 기고문에 답변합니다.
첫째. 삼가 역사의 가장 정확한 기록은 삼가현읍지가 되어야하고, 합천군 역사의 가장 정확한 기록은 합천군지(陜川郡誌)가 되어야 하지만 오류는 더러 발생한다. 이런 의심이 가는 기록은 여러 방면으로 검토 조사해서 타당성을 분별해야하는데, 고려사, 세종실록, 감한리(甘閑里) 자기소(磁器所) 등등의 공신력이 큰 자료가 오류라고 증명하는데도 무시되었다.
둘째. 예전의 행정구역은 도로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선긋기로 보이는 지역이 많았고 지금까지도 그런 지역이 더러 있다. 의령군 대의면 소재지 일부가 삼가면이었고, 의령군 봉수면도 자굴산 너머에 있지만 삼가현이었다. 가회면도 봉수면과 같이 삼가현*가수현의 현청소재지로서 적합하지 않았다는 소견이었습니다.
셋째. “삼가 고을을 기산, 기양, 가수, 봉성(岐山, 岐陽, 嘉樹, 鳳城) 등으로 사용되었음은 많은 전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라고 하고, “가수(嘉樹)가 봉성(鳳城)이 별칭이기는 하지만 동일 장소로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구분 없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기산(岐山)은 대병면의 동일지명이며, 봉성(鳳城)은 가수(嘉樹)의 동일지명입니다.
만약에 삼가면에서 면지(面誌)를 만든다면 옛 가수현읍지의 기록을 모두 버리고 현재의 기록만으로 만드는 삼가면지(三嘉面誌)가 아닌 옛 가수현읍지의 기록을 망라한 삼가현지(三嘉縣誌)로 이름 지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 가회에 가수현청이 있었더라면 감한리 자기소를 반드시 가수현의 동쪽(甘閑里磁器所 在縣東十里)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다섯째. 선배님께서는 합천신문 2016년 5월 25일자 「삼가향교 연혁」 기고문에서
“봉기리에 가수정 터가 있는데 옛 가수현 때 있었던 가수정터 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로 가수현청과 연관지우셨으나 삼가읍지의 기록에 가수정(嘉樹亭)이 아래와 같이 “현의 삼십리 서쪽 덕촌에 두 그루의 괴목(홰나무) 있어 세웠는데 허씨 삼덕재(三德齋)옆에 있다.” 라고 실려 있어 가수현청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수정(嘉樹亭) 재현서삼십덕촌이고괴특립방유허씨삼덕재(在縣西三十德村二古槐特立傍有許氏三德齋)
또, 삼가를 세종조에 대병에서 삼가현청이 옮겨오기 전까지는 한촌(閑村)이라고 두 번이나 단정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적어도 고려 시대나 그 이전 명칭으로 보이는 기양(岐陽)이라는 삼가의 별칭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세종조 이전의 삼가는 보잘 것 없는 한촌이라고 하시는 것은 어불성설로 보입니다.
삼가사적비는 사사로운 문중의 비(碑)라도 독단적으로 해서는 아니 되는데, 하물며 1억원의 막대한 군비를 지원받아 세우는 삼가현의 역사를 기록하는 비문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에 부합하는 기록으로 반드시 수습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