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 찾기 (4)| 조선의 왕사 무학, 고향 합천을 찾다
(특집기획: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인한 쇠퇴해져 가는 지역을 살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풍성한 ‘문화(文化)’라는 자산을 잘 간직하고 빛내는 것이라 본다.
특히 우리 지역이 배출한 인물을 연구하고 창달하는 것은 지역민의 사기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지역의 문화콘텐츠나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런 방향에서 합천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무학대사는 조선의 기틀을 세우는 등 조선조 최고의 고승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며, 민간에서 민중들에게 큰 인기를 받았던 만큼 관련된 많은 설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인물이다. 이런 위인이 태어난 합천임에도 지역에서 관련 유적을 고증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미진했다. 그러다 보니 근래엔 대사의 출생지를 합천이 아닌 충난 서산시라 주장하며 기념비를 세우는 등 출생지 논란이 있기까지 했다. 이에 무학대사와 관련된 지역의 유적을 밝혀내고, 무학대사가 합천의 인물로 배출되어 훌륭한 업적을 남긴 그 전모를 밝혀내고자 한다.)/박황규 기자

금의환향(錦衣還鄕). 비단옷 입고 고향을 돌아온다. 출세해서 고향을 찾을 때 쓰는 말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둔다는 말인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자연에 깃든 원초적 감정일까. 인간으로서 인생의 절정이나 한계에 이르게 됐을 때, 자신의 근본과 뿌리를 생각하게 된다. 조선 개국 첫 왕사(王師)가 된 무학은 언제쯤 고향에 돌아왔을까? 무학대사가 왕사로 공식인정을 받게 되자,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무학의 고향인 삼기현을 승격시켜주었다. 그외에도 하산소(下山所)라고 하는 특정한 사원을 지정하고 혜택을 주었다. 무학의 대표적 하산소는 양주 회암사로 볼 수 있지만, 고향에서도 무학이 왕사가 됐다는 소문을 듣고 가족 뿐 아니라 마을사람들까지 삼기현 전체가 떠들썩하게 환영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법회 초청 등의 명분으로 무학이 수차례 합천을 방문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그리고 이것을 빌미로 무학왕사를 기념하는 큰 절을 하나 관민이 힘을 합쳐 세웠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다. 기존에 있는 절을 중창했을 수도 있고, 새롭게 지은 절일 수도 있다. 또는 무학왕사가 주거하는 일대에 탑과 절 등 여러가지 불사가 일련의 성역화 사업처럼 진행됐을 수도 있다. 이후 600여 년이 흘렀다. 지금 합천에 남아있는 무학의 흔적은 아주 적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무학이 남겨놓은 강력한 증거와 소중한 유산들을 하나하나 챙겨보자.
무학대사유허지와 부도사(사나사)
합천에 남아있는 가장 강력한 무학대사의 흔적은 바로 대병면 대지리 월여산에 있는 <합천 무학대사 유허지(陜川 無學大師 遺墟址)>이다. 합천군 대병면 대지리에 있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유적지이다. 면적은 약 39,918㎡(1만2천여평)이다. 유허지 일대에서는 건물지 16동, 축대 배수로, 괘불지주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고 각종 토기와 기와류 등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12세기부터 18세기까지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7세기 초기부터 후기까지는 실제 사찰로 이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와 각종 지리지를 참고하여 이곳이 조선 태조 때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와 관련 있는 유적임을 확인하고 무학대사 유허지라고 명명하였다. 2008년12월11일 경상남도기념물 제269호로 지정되었다.
이 절터는 현재 발굴조사가 거의 완료되어 현재 석축을 원래대로 정비한 상태다. 직접 가보면 폐허가 된 절터이다. 법당과 여러 건축물의 배치나 전체 조망 등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을 정도이다. 중심건축물 앞에 있는 괘불지주 2쌍이 온전치 않게 잔존해있고, 나무가 하나 자라있다
위양근 가야역사문화연구원 조사부장에 의하면, 현재 이 <무학대사유허지>가 부도사(浮屠寺) 또는 사나사(舍那寺)라고 하는 절이 아닐까 추정된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년(영조 33)∼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한 전국 읍지) 삼가현읍지 불우조(佛宇條) ▲여지집성(與誌集成) 삼가현읍지 사찰조에 부도사(사나사)를 표시하고 있다. 특히 ▲비변사인방안 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국가 군무와 국정을 총괄했던 비변사에서 1740년대에 편찬한 지도), ▲광여도(廣輿圖; 19세기 초에 제작된 회화식 전국 군현 지도)에는 악견산-금성산-허굴산 서쪽 병목면에 위치됐다고 표시되어 있으며, 더구나 광여도에는 월여산(月如山)이라고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이밖에 해동지도(海東地圖;18세기에 만든 조선의 각 도별 군현지도집), 여지도(輿地圖), 지승(地乘)에 표시된 ‘승무학태생처(僧無學胎生處)’ 위치도 부도사 위치와 비슷하다고 한다.
고로 부도사는 무학대사 출생지 주변에 세워진 사찰로 이해될 수 있고, 여러 고지도에서 나오는 증거들이 현재의 무학대사유허지와 거의 일치한다.
전체적 배치가 조선 전기 왕실원찰인 회암사를 비롯한 원각사, 봉암사, 상원사의 가람배치에 나오는 品자형 배치와 횡랑이 확인되어 무학대사와 관련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석축의 축조방법인 조선 전기 성벽축조방법과 유사하다. 남겨진 괘불지주에 나오는 금석문에 “옹정雍正2년갑진甲辰4월”이라는 명문이 새겨졌는데, 옹정2년은 영조2년(1724년)에 해당하는 연호이므로 18세기 전반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학대사유허지 가는 길
위치는 대병면 대지리 산2번지. 합천댐을 지나 대병 회양관광단지도 지나 봉산 방향으로 가다가 유전삼거리에서 대지리로 접어든다. 이후 네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계속해서 올라가면 갈수록 길은 협소해지고 험하다. suv차량이나 4륜구동이 가능한 차량이어야 통행이 가능할 것 같다. 현장은 황량하고 조용한 산속이라 허무한 느낌마저 들지만, 쌓인 석축을 따라 건물 배치 등을 상상하고 걷다 보면, 조용히 희열이 차오른다. 무학대사의 숨겨진 발자취가 느낀 듯 했다. 폐사지를 둘러보고 위쪽 산길을 따라 좀더 올라가면, 무학당(無學堂)이라 적힌 표지석이 있다. 가야역사문화원에서 2004, 2006년 2차례 지표조사를 할 때 월여산 질매제에서 발견되어 지금과 같이 세워두었다고 한다. 근처 암자의 간판 역할을 하다가 폐사가 되면서 묻혀있었던 게 아닐가 추측한다.
무학대사 유적지 복원과 관련해서 노력해온 합천군 서광운 계장은 “다른 문화재 관리와 마찬가지로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문화재를 관리하고 관광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토지보상 등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토로했다. 현재 석축을 쌓아 유허지 복원은 끝난 상태이며, 아직 진입로 정비가 다 된 상황은 아니며, 황매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등산로 개척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이외 댐건설과 유속이 빠른 강 중심에 있는 구리방이나 무학샘을 복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며, 차후 상천리 탑천 부근, 구리방 전설 부근은 좀더 정밀 탐사가 필요해보이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보존과 관광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앞으로 ▲안내판 ▲주차장 영역 정비 ▲진입로 정비 등이 필요할 것 같다.(이곳에서 발견된 삼층석탑은 현재 합천박물관에 복원되어 있다는 표시도 있어야 할 것 같다.)

무학이 합천에 남긴 발자취
무학이 합천에 남긴 유형-무형의 발자취를 망라해본다.
1)무학대사유허지: 대병면 대지리 월여산에 위치. 사료적으로 대단히 큰 가치가 있다.
2)대병면 상천리 사지와 탑지: 합천댐 아래 절터와 탑터가 발견된다. 수몰지역이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으며 좀더 연구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3)무학당(無學堂): 광여도에 무학당이 나온다. 이는 부도사(무학대사유허지 장소로 추정) 표시와 별도로 있어, 별도로 무학당이라는 곳이 존재할 것으로 유추된다. 지도에 의하면 현 합천읍에서 25리(약10km) 떨어진 지점이다. 그리고 근처에 폭포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볼때 무학당의 위치는 지금의 성리-황계리-장전리 일대에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위양근說) 위 무학대사유허지에서 발견된 무학당이란 표지석과는 다른 곳일 것으로 본다. 앞으로 꼭 찾아내야 할 곳이다.
4)무학천(無學川): 황강 중심에 있는 약천(藥泉)으로 유명한 곳이다. 무학의 모친이 몹쓸 병으로 고생하자 무학이 기도를 올린 후 암반 중심에 샘을 팠다. 삼복더위에도 이 샘에 목욕하면 5분을 견디기 어려운 한천이며, 어머니 병환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현재 합천댐 수문 아래 물길에 위치한다. 현재는 그 형태를 찾기가 어렵다.
5)무학샘(호박샘): 구리방 아래쪽 황강 가운데 자리한 호박같이 생긴 샘이 있는데, 이것을 무학샘이라 한다. 주위가 강이고 옆에는 용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호박처럼 생겼고 바위 속에서 샘이 솟는다고 호박샘이라 한다.
6)구례방(九禮放,求理防): 설화에 의하면 모친이 여름에 벌레때문에 괴로워하자 부적을 싸서 땅에 묻고 진언을 외우니 그 뒤로 벌레, 쥐 등이 자취를 감추고 칡넝쿨까지 없어졌다고 한다.
7)무학감나무: 무학이 살았다는 구리방 맞은편 황강변 평학마을 가는 길목에 감나무 한그루가 심어져 있다. 이 나무는 18세 출가할 때 무학이 심었다고 하며, 나무를 심을 때 어미에게 “이 감나무가 죽거든 내가 죽은 줄 알고, 감나무가 죽지 아니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으로 알아달라” 말하고 떠났다고 한다. 이 감나무는 2001년에 고사(枯死)했다. 이 나무가 있던 자리에 <무학왕사출생사적비>라고 새긴 표지석이 있다. 앞으로 고사된 부분을 그대로 두고, 새롭게 무학대사를 기념하는 감나무를 심어서 그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8)무학탄(無學灘): 대병면 성리에 있는 무학탄은 개목정(介木亭)에서 황강까지 약2km에 걸쳐 큰돌이 깔려 있는 곳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무학의 모친이 구례방에 있을 때 건너편 개목정에 물이 흘러 길레 뻗어 있는 것이 사람이 뛰어오는 형상으로 혹시 무학이 출타하였다가 돌아오지 않아 문밖을 보면 무학이가 달려오는 것처럼 보이므로 모친이 물에 속은 것을 알고 무학이 미안하여 인근 돌을 밀어 넣어 돌너들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아무리 큰 홍수가 져도 돌 밑으로만 물이 흘러 돌 위에서는 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 너덜겅을 무학탄 또는 황석탄이라고 하며, 방언으로 <잠냄이너들겅>이라고 부른다.
9)무학바위 설화: 무학바위는 합천댐 둑에서 동남쪽으로 300m지점에 자리한 큰 바위로 바위의 위쪽이 비스듬하여 무학의 천서(天書) 3권을 묻었는데, ‘나의 제자가 나오게 되면 책을 찾아간다’고 이야기하고 떠난 곳이다. 바위 위에 왼 손으로 돌을 던져 떨어지지 않으면 아들 못 낳는 사람이 영특한 아들을 낳는다 하여 지나는 길손들이 하도 돌을 많이 던져 올려 작은 돌들이 수두룩하다.
10)해인사 화재 설화: 무학이 하루는 마령재를 넘어가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큰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소변에 적셔 서북방(해인사)을 향해 뿌리고 한참 후에 돌아오니, 이유를 물으니, 지금 해인사 법당에 불이 나서 불을 끄고 오는 길이라 이야기한다. 그후에 해인사 중을 만났는데 “모월모일에 해인사에 불이 난 일이 있느냐” 물으니, “법당에 불이나 위급할 즈음에 홀연히 뇌성이 울리고 폭우가 내려 순식간에 진화되었다”고 한다. 그 일시를 헤아려보니 무학이 소변을 뿌린 때와 일치했다.
무학대사를 기억하라!
합천이란 시골에서 평범하거나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보이는 무학. 혈기왕성할 나이인 18살에 출가한 무학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랑하는 어머니를 두고 구도의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 떠나게 된 개인적 동기나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닐까? 27살에 머나먼 이국땅 원나라로 유학을 떠나고, 지공화상과 나옹화상의 인정을 받을 정도의 수행력을 이뤘지만, 평생을 떠돌아다니는 방랑 수행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 후 66세에 이성계를 만나 왕사가 되고 이후 79세 입적하기까지 그 모습은 어땠을까? 그 모든 질문은 만고풍파에 깎이고 흩어진 폐사지(廢寺址)처럼 그 전체 모습을 온전히 그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남겨진 약간의 자료, 설화, 흔적 등이 우리에게 있어 그의 정신, 모습을 그려본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모습의 무학을 살펴보았다. 즉 조선을 건국하는데 일조하며 왕사로 추앙받았던 무학, 풍수가로서 백성들에게 인기를 끌며 민간설화의 주인공이 된 무학,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던 무학, 아이를 돌보듯 백성을 돌보라는 영아행(嬰兒行) 가르침을 펼친 무학, 삼화상(三和尙)으로 불교계 핵심으로 추앙받은 무학 등이다. 이렇듯 조선시대 초대 왕사를 지내며 고향 합천을 전국에 명성을 날렸던 무학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초 그런 무학이 있었기에, 해인사에 대장경판을 보관하게 된 인연이 되었을 수 있고, 남명 조식 선생이라는 유학계의 거두를 배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수 있다. 예부터 삼산(악견산-금성산-허굴산)의 정기를 잇는 3명의 위인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지금까지 무학대사, 남명 조식 선생이 있었다. 이제 前무학을 뛰어넘는 後무학이 나와야 할 때이다. 그런 긍지와 포부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때이다. (끝)
※참고문헌: 황인규, 마지막 왕사 무학대사, 밀알,2000년 / 합천문화원부설향토사학회,조선최고의 고승 무학대사,합천문화원,2010년 / 2020년 합천군-창원대학교박물관 공동학술대회 자료집(2020.11.13)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