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운잡기| 지공선생의 수칙 – 권해조 논설위원
며칠 전 한 친구로부터 ‘지공선사(地空禪士)’가 지켜야 할 15가지 수칙과 덕목이란 글을 받았다. 지공선사란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경로석에 앉아서 지그시 눈 감고 참선하라는 자격증이다. 고맙게도 우리 정부는 만 65세가 되면 ‘지공선생’ 자격증을 준다. 이는 남녀, 학벌, 경력, 재산 구분 없이 누구나 나이만 되면 준다. 특히 여자의 경우 ‘지공녀’, ‘지공여사’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런데 ‘지공선사’가 되어 지하철을 공짜로 자주 이용하다 보니 ‘지공선사’로서 지켜야 할 수칙이 있고, 책임과 의무도 있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어느 지공남(地空男)이 지하철에서 참선하며 터득한 수칙은 다음과 같다.
- 출퇴근 시간에는 지하철을 타지마라. 출퇴근 시간에 비좁은 지하철에서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짊어진 지공선사는 젊은이들이 빨리 죽으라고 속으로 저주하고 있다.
- 지공선사의 지정석은 경로석이다. 젊은이 좌석에 앉지 마라. 경로석이 비어 있는데 젊은이 자리에 앉으면 공연히 자리만 줄어들어 젊은이들이 화를 낸다.
- 젊은이 앞에 서 있지 마라. 젊은이가 피곤한데도 자리를 양보해야하니 곧 내릴 것 처럼 문 앞에 서있거나 경로석 앞에 있어라.
- 눈을 감고 앉아 있어라. 눈을 감고 도를 닦는 것처럼 보이고 참선하는 것으로 인정받아 지공선사의 진짜모습으로 위장된다.
- 자기보다 더 나이가 먹어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면 벌떡 일어나라. 내 앞에 나보다 더 늙은이가 서 있는지 수시로 살피다가 지공녀나 나보다 더 늙어 보이는 선사가 나타나면 자리를 양보하는 에티켓을 지켜라.
- 경로석에서 모자를 벗어라. 모자를 쓰고 있으면 10년 젊어보여서 가짜 지공선생으로 오인 받을 수가 있다. 모자를 벗고 대머리나 백발을 보여라.
- 경로석에서 스마트 폰을 보지마라. 젊은이처럼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릴 나이는 한참 지났으니 지공선사 품위만 손상되고 참선하는 데 방해가 된다.
- 항상 깨끗한 옷차림으로 단정해야 한다. 늙으면 추해지고 냄새가 나고 꼰대 티를 내어 젊은이들이 싫어한다, 외모에 신경을 써야 대우를 받는다.
- 정치이야기를 하지마라. 젊은이와 말도 안통하고 자기고집만 내세우며 목소리가 커지고 아는 척 많이 하며 자기 생각만 옳은 줄 안다.
- 큰 소리로 떠들지 말라. 과거 경력이 화려하고 거창해도 흘러간 지식과 경험은 이제 남이 알아주지도 않고 달밤에 개짓는 소리일 뿐이다.
- 술 취해서 지하철 타지마라. 술과 안주 냄새는 옆 사람에게 큰 고역으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 데도 이런 사실도 모른다.
- 경로석에 퍼지고 앉지 마라. 넓게 양다리 벌리고 두 자리를 한 사람이 차지하여 자기 안방처럼 전용하지 말고 존엄과 예의를 지켜야 한다.
- 경로석에 앉은 젊은이를 혼내지 마라. 나이 많은 게 계급도 아니고 공짜로 타는 주제에 피곤한 젊은이가 앉아 있다고 훈계하면 안 된다.
- 할 일 없이 지하철 타지 마라. 할 일 없는 노인들이 지하철을 독차지 하면 젊은 이들이 정부의 잘못을 질책한다.
- 능력이 있으면 돈 내고 타라. 재력이 있거나 사회 보탬이 되려면 돈 내고 타고 다닐 만 하다고 생각하고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르라.
노인들에게 지하철 공짜제도는 현재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있는 경로우대제도이다. 지하철은 냉 온방 시설이 잘되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지공선사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특히 수도권 지하철은 공짜로 서울 인근인 강원도 춘천, 경기도의 소요산, 문산, 인천의 송도와 인천국제공항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충남 천안과 온양온천까지도 갈 수 있도록 잘 짜여 있다. 내일부터라도 모든 지공선사들은 정부의 고마움을 알고 지하철 이용 시 에티켓과 수칙을 잘 지켜 건전한 지하철 문화에 기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