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봄비는 무죄 – 문경자 수필가
가뭄에 목말랐던 대지가 촉촉이 젖었다. 타이루가 깔린 길도 반질반질 생기를 찾았다. 그 위를 걷는 다는 것은 늘 조심스러웠다. 아차 하다가 미끄럼타는 일도 생기곤 한다. 외출을 할 때는 안전한 신발을 싣는 것도 한방법이다.
신정 네거리역 근처 신발 가계를 들어갔다. 여러 가지 모양과 색상들의 운동화를 예쁘게 진열해 놓았다. 눈에 들어오는 신발은 가격이 있는 만큼 품질이 좋아 보였다. 내가 생각하는 운동화는 검정색인데, 아무 옷에나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운동화 사이즈를 골라 신어보니 역시 편안하고 안전감이 있었다. 점원에게 다른 신을 신어 보겠다고 했더니 아가씨들이 싣는 거라 손님에겐 이 신발이 잘 맞지 않는다며 아예 신어 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한때는 날린 아기씨야! 꽃 모자 쓰고 남산길을 걸으며 휘파람을 부는 남자들이 있었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점원이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면서 미끄럼 방지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비가 자주 내리는 봄, 여름은 위험이 뒤 따른다. 새운동화라 조금은 안전하지 않을까!
굽이 높은 구두는 신을 엄두도 못 낸다. 발의 모양도 세월 따라 많이 변했다. 언제부터 나도 모르게 구두를 신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구두를 못 신을 거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값이 나가는 검정색 구두를 신어 보겠다고 작심하고 발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유연하게 발이 잘 들어가 기분이 좋았다.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똑똑 구두소리가 듣기 좋았다. 몇 발자국을 떼어보니 발이 아프지 않고 편안하였다. 살랑되는 봄바람도 구두소리에 춤을 추는 듯했다. 초등학교 후문을 지나 장미, 감나무, 앵두나무, 목련나무, 벚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을 걸었다. 걸을 때마다 발의 근육이 굳어 오는 느낌이 들었다. 멋내기는 이제 다 틀렸다. 발이 아프면 하루 일과는 다 망친다는 생각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운동화로 바꿔 신고 나갔다.
봄비가 내렸다. 동네 슈퍼 가는 길.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가니 폭신하고 가벼워서 착용감이 좋았다. 거리에 물기가 많아 작은 실수를 할까 봐 조심하면서 걸었다. 앞에 가는 아가씨는 굽이 높은 빨간 구두를 신고 예쁘게 걸어 간다. 반면에 할머니는 꾸부정한 허리를 하고 조심조심 발을 떼어 놓았다. 지나가는 자동차는 빗물을 튕기며 빨리 달린다. 옷가계와 문방구를 지났다. 김밥집에서 풍기는 구수한 참기름 냄새가 유혹을 했다. 걸어오는 동안 새 운동화가 한 두 번 작은 미끄럼을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자주 다니는 길인데 오늘따라 낯설게 보였다. 작은 내리막길을 편편한 줄 알고 딛는 순간 눈앞에 번개가 쳤다. 팔 뒤꿈치가 부숴지는 소리가 들렸다. 때마침 지나가는 아저씨가 많이 아프겠네요 하는 소리에 얼른 일어났다. 좀 창피하기도 했다.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내려고 해도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날은 괜히 봄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미끄러 지지 않았을 텐데 하고 투덜거렸다.
슈퍼에 가지도 못하고 바로 동네 신경 외과 전문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안은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 오른 팔에 붕대를 감은 아저씨, 바글바글 베토벤 머리에 등이 굽은 할머니, 많은 환자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팔에 장애가 와서 핸드폰도 마음대로 열수가 없었다. 집에서 나올 때 멀쩡한 팔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내이름은 언제 부를까 하고 진찰실을 쳐다보았다. 마침 그때 간호사가 문경자님 하고 불렀다. 속으로 혹시 팔꿈치에 뼈가 금이 가지나 않았을까! 조바심을 태우며 의사 앞에 앉았다. 의사는 “어디가 아파서 왔어요.? 하며 안경너머로 물어본다. 그 때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더니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한번 오른쪽 팔을 크게 다쳐 6개월간 치료를 받았는데 또 다쳐서 회복이 늦어 질 수가 있어요. 그래도 그만하기가 다행이라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처방전을 받아 주사실로 갔다. 간호사는 인정사정없이 두 가지 주사를 놓아 주면서 많이 아프니 잘 문질러 주세요 하고 나갔다. 물리 치료를 받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 가니 환자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독 냄새와 물리치료실의 기계소리가 들렸다. 15번 방에 들어가 치료를 받았다. 찜질을 하고 난 후에 이상하게 생긴 장난감 같은 것을 팔꿈치에 부착시켜주었다. 동그란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인데, 사람도 아니고 손도 없는 것이 조물조물 만져주니 시원하였다. 외과에 가면 치료를 받아 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폈다 오므렸다 하는 손 놀림은 신기하기도 하고 치료효과도 있었다. 이런 기계를 하나 구입을 하여 집에서 치료해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병원을 나와 내리는 비를 보면서 봄비조심 하면서 길을 걸었다. 팔을 치료 한지도 3개월. 옷을 입고 벗을 때나 화장할 때 젓가락질이 서툴러 불편하다. 잘 못 움직이다가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그나마 운동화를 신었기에 이만하지, 만일에 구두를 신고 넘어졌다면 엄청나게 다쳤을 가능성이 있었다. 내일 봄비가 많이 내린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그저 아름답고, 봄비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그런 감정은 눈곱만큼도 없고, 그저 빗길을 걸어도 미끄러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봄비는 무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