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삼보사찰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의 창건유래 (1)

이병생
합천문화원향토사
연구소장

전국의 사찰마다 창건유래가 있기 마련인데 삼보사찰 해인사(법보), 통도사(불보), 송광사(승보) 역시 창건유래가 있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해인사(海印寺) 창건 유래

해인사란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 남서쪽에 있는 사찰로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신라애장왕 3년(802년) 10월 순응과 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 되었다. 918년 고려를 창건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이 후백제의 견훤을 물리치고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아 해동 제일의 도량이 되게 하였다. 1399년(태조7년)에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을 서울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해인사는 본당을 비롯하여 16개의 암자와 15곳의 폐사지를 갖고 있으며 비구, 비구니 스님(400~50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통도사(불보), 송광사(승보)와 더불어 삼보사찰 가운데 하나이며 법보 사찰로 유명하다.
“해인사의 창건유래”를 살펴보면 「사람이 잘되고 못됨은 곳에 딸리고, 땅의 성하고 쇠함은 시절에 관계되는 것이다.」가야산해인사는 해동의 명찰이다.
옛날 양나라 때 보지공 스님이 임종할 때에〈답산기〉를 제자들에게 전해주면서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신라의 두 스님이 와서 법을 구할 것이니, 그분들에게 이〈답산기〉를 주라”하였다. 그 뒤에 과연 신라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중국에 가서 법을 구하였는데, 보지공의 제자가〈답산기〉를 내어 주면서 공이 임종할 적에 하던 말을 전하였다.
두 스님은 그 말을 듣고 공의 묘소에 찾아가서 “사람은 고금이 있거니와 법에야 어찌 앞뒤가 있겠습니까?”하면서 밤낮 이래 동안을 선정에 들어 법을 청하였다.
어느 날 묘문이 저절로 열리어 보지공이 나와 법을 말씀하시고, 가사와 바리때 또 망피혜(용무늬를 그린 가죽신)를 주면서 당부하였는데 그 가사와 바리때가 지금까지 있어 보배로 전한다. 말하기를 “너희나라 우두산(가야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너희들은 본국에 돌아가 별비보대가람 해인사를 세워라!” 하고는 묘문 안으로 들어갔다.
두 스님이 신라에 돌아와 우두산 동북쪽으로 영을 넘어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사냥꾼들을 만나 “그대들이 이 산을 두루 다녀 잘 알 것이니, 어디 절을 지을 만한 곳이 없던가?”하고 물었다. 사냥꾼들은 “여기 조금 내려가면 물 고인데(지금의 비로전=대적광전자리)가 있고, 또 기와, 철와(지금의 비로전 지붕위에 있음)가 많으니 거기 가서 보시오!”하고 대답하였다. 두 스님은 물 고인 곳에 이르러보니 마음이 흡족하였다. 풀을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는데 정수리에서 광명이 나와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다. 그 때는 마침 신라 제40대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이 났는데 좋다는 약은 모두 써 봐도 효력이 없으므로 임금이 신하들을 여러 곳으로 보내 고승 석득의 구호를 찾던 때였다. 사신이 지나가다가 하늘에 치솟은 붉은 기운을 바라보고 이상한 사람이 있는가보다 여겨 산 아래 이르러 숲을 헤치면서 수 십리나 들어갔으나 시내가 깊고 골짝이 좁아 갈 수가 없었다.
지금의 최치원이
狂奔疊石 吼重巒 人語難分 咫尺間
광분첩석 후중만 인어난분 지척간
常恐是非 聲到耳 故敎流水 盡籠山
상공시비 성도이 고교유수 진롱산
이라고 시를 쓴 곳(홍류동)에서 한참 망설이고 있었는데 때마침 여우가 바위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따라가다가 성보 박물관 건너편 큰 바위 있는 곳에서 사라졌다하여 그 바위를 자취바위라 하고 그 골짜기를 자취골이라 부른다.
한참 위로 올라오니 두 스님이 선정에 들어 방관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공경하여 예배하고 왕궁으로 함께 가기를 청하였으나 두 수님은 허락하지 아니 하였다. 그들이 병난 사연을 말하자 스님은 오색실을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실한 끝은 궁전 앞에 있는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끝은 아픈 곳에 대면, 병은 곧 낫고 배나무는 말라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가 임금에게 여쭙더니 그대로 시행하였다. 과연 배나무는 말라죽고 병은 나았다. 임금이 감격하여 나라 사람들을 시켜 이절을 짓게 하였으니, 때는 애장왕 3년(802년) 임오요, 당의정원18년이라 임금이 이절에 와서 전답 2500결을 드리고 경찬하였다. 또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는 이절을 지을 적에 애장왕이 와서 먼저 비봉산 밑에 봉서사 그 후 부광암이라 하다가 지금의 원당암을 짓고 있으면서 공사를 감독하여 정사도 여기에서 하였으므로 비봉산 넘어 삼정리에는 삼정승이 있었고, 삼정승이 타던 말을 메어두던 곳은 마장동, 말을 먹이기 위하여 풀을 쌓아 두던 곳은 초막동이라 하였으며, 애장왕이 갔다 자시던 물의 샘이 극락전 동쪽에 있어 어수정(샘)이라 하고 또 절 앞 성보박물관 서편에는 옥가평(감옥소)이 있게된 것이 모두 그때의 유적이라 한다. 순응대덕이 절을 짓다가 입적하고 이정스님이 이어 받아 굉장하게 공사를 마치었다.
창건이후 사찰 명을 해인사라 지은 것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인삼매는 일심법계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 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이니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해인삼매는 또한 오염됨이 없는 청정무구한 우리의 본디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의 마음이 명경지수의 경지에 이르러 맑고 투명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비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해인사란 삼매(선정)의 이름인데, 마치 고요한 바다에는 온갖 사물의 그림자 인발(인영)처럼 비추듯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도 일체만법이 역력히 나타나므로 이를 해인삼매라 한다.
신라의 의상조사가 당나라의 지엄법사에게<화엄경>의 깊은 뜻을 전해 받고 본국에 돌아와서<해인>을 신표로 법을 전할 적에, 그 상수제자 상원에게 전하고, 상원은 신림에게, 신림은 다시 순응에게 전하였으므로 순응, 이정 스님이 이 절을 짓고 화엄의 도장이란 뜻에서 해인사라 이름을 짓게 된 것이다.
해인사 터는 풍수지리학설로 행주형국(行舟形局)터이다. 배가 넓은 바다를 지나가는 터로서 행주형국 터는 사람이 많이 출입하고 돈이 많이 생긴다는 터이지만 지하수는 뚫을 수 없다.
배에 물이 차올라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인사 본당을 비롯하여 각 암자에도 샘물을 이용하지 지하수를 판 곳은 하나도 없다. 즉 예로부터 해인사를 위시한 주위의 형세가 파랑의 대해에 띄워진 방주와 같다하였으며, 가야산이 선체라면 해인사는 선실이고, 중봉의 마애불상은 선장님이 서 계심이며, 남산제일봉의 기암돌은 삿대가 된다. 그리고 이 언덕에서 피안까지 무사히 중생을 요동 없이 옮겨주는 대척 중심부의 거대한 돛대가 장경판전 뒤 노송속의 웅대한 바위(지금의 9층탑 있는 자리)인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