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운잡기| 합천출신 거유(巨儒) 남명과 황강 선생 – 권해조 논설위원
조선조 중기의 같은 시대에 남명 조식과 황강 이희안 이라는 대유학자가 있었다. 두 분은 우리 고향 합천이 낳은 역사에도 길이 남을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먼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은 1501년(연산군 7년) 합천군 삼가현 토동(兎洞, 현 외토리)에서 태어나 남명학파의 거두가 되었다. 48세 때 모친상을 당해 토동으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과 계부당(鷄伏堂)을 짓고 제자들을 길렀다. 55세 때 그 유명한 단성소(丹城疏)를 명종에 올려 조정을 격동시키고 사림(士林)의 기개를 높였다.
남명 선생은 출생할 때 우물에 비친 무지개빛이 방안에 가득하였다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도 스스로 깨달았으며 성격도 대장부처럼 쾌활하고 씩씩하였다. 청년시절 남명은 존경하는 인물의 초상화를 방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면서 훌륭한 분들의 인품을 본받고 어려운 학문의 이치를 깨우치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는 ‘넓고 깊은 지혜를 훤히 깨우치고(敬), 바르고 옳은 것은 꼭 실천하자(義)’는 경의(敬義)를 그의 방에 붙여놓고 공부하는 목표로 삼았으며 경의검(敬義劍)을 만들어 늘 차고 다녔다.
나라에서는 인재가 필요할 때마다 남명 선생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번번이 거절하였다. 오히려 제자들과 같이 공부하는 일을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임금이라도 그릇된 정치를 할 때에는 바른 말로 상소하였고, 신하들이 편을 갈라 다툴 때나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워 힘들 때에는 흔히 눈물을 흘리면서 나라걱정, 백성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중국의 명나라 사람들도 남명 선생이 오래 살지 못함을 슬퍼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멀리 중국까지 알려졌다. 그는 후세까지 우리 민족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대학자요 교육자였다. 남명 선생의 가르침은 바다처럼 넓고 산보다 높았으며, 우리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남겼다. “지금 사람들은 집안 청소하는 순서도 모르면서 잘난 체하고 모든 것을 아는 듯이 지껄인다.”며 실천하는 생활을 목표로 삼았다.
남명 선생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말만하거나 자기의 조그만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이렇게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그의 제자들은 다른 고을 선비들과 달랐다. 벼슬길에 올랐던 제자들은 임금님의 미움도 겁내지 않고 바른 정치를 하였고, 고향에 남았던 제자들은 공부와 농사 등 모든 일에 이웃의 본보기가 되었다.
선생은 만년에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산청 덕산에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머물면서 평생 닦은 학문과 정신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켜 극난극복의 선봉이 되도록 하였다. 그는 불의(不義)를 보면 일어나 싸우고 바르게 생각하여 올바른 것은 꼭 실천하라고 하였고, 나라의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과감히 일어나 구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문하생으로 정인홍, 곽재우, 전치원, 이대기, 박사체 등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목숨을 건 의병장만도 50여명이 넘었다.
다음은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1504-1559) 선생이다. 황강 선생은 충.효.예를 행동으로 실천한 합천고을의 대유학자로 1504년(연산군 10년) 쌍책면 성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모습이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재주가 뛰어나 10세 때 한시를 지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한번 배운 내용은 그것을 꼭 실천하였고 행실이 바르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14세 때인 1517년(중종 12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1538년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참봉이 되었으나 바로 사직하였다. 그것은 대과에 급제하여 장래가 촉망되었던 형님 두 분이 20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형제 간 효성이 지극했던 황강 선생은 남은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키웠고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3년간 상복을 입고 초하루 보름에는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 가서 슬피 울었다.
그 뒤 1554년(명종 9년) 유일(遺逸: 과거를 거치지 않고 학덕과 명망으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학자)로 천거되어 고령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곧 사직하였다. 그 뒤 군자감판관에 제수되었으나 또다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남명 선생과 교류하며 오로지 집안을 다스리고 밤낮으로 학문을 연구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후에 초계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이처럼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고고한 학처럼 청빈하게 살았던 황강 선생은 당시의 선비와 관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 시기에 살았던 가장 훌륭한 조선의 대학자 세 사람으로 안동의 퇴계 이황(李滉)과 산청 덕산의 남명 조식, 합천 성산의 황강 이희안을 들고 있었으며, 학문이 높고 흠모한다하여 “삼고” 또는 “삼산”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의병장인 의령 곽재우, 합천 정인홍 등은 남명선생의 제자들이며, 초계지역의 유명한 의병장인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등은 황강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충’을 실천에 옮긴 제자들이다. 호국보훈의 달과 6월1일 ‘의병의 날’을 맞아 합천 임난창의사(壬亂倡義祠)에 모신 121명의 창의의사(倡義義士)들과 임진왜란 당시 훌륭한 의병장을 길러낸 남명. 황강 두 선각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