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2인자(5) 해월 최시형 – 김현덕 법무사
- 들어가는말
정조의 아들 순조로부터 시작되는 19세기의 조선은 암울함의 연속이었다.
안으로는 교조주의인 유일신념체계인 주자학만을 인정하고, 다른 어떠한 학문도 이단으로 배척했으며, 관리들의 수탈과 부패는 일반민초들을 아사(餓死)직전까지 몰고갔다. 밖으로는 서양의 발달된 자연과학의 힘을 배경으로, 제국주의가 극에 달해,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 되어있던 시기였다. 이에 조선 민중을 이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서학과, 이것과 반대되는 동학운동이 전개되게 된다. 동학은 몰락한 양반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새로운 종교로, 대내적으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만민평등(조선의 양반, 중인, 상민, 노비의 신분타파를 목표)과, 대외적으로는 척양, 척외를 외치는 당시로서는 실로 혁명적인 종교가 아닐수 없다.
이 글에서는 동학을 개창한 수운 최제우를 간단히 살펴보고, 그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후계자 해월 최시형에 대해 알아보고자한다. - 수운 최제우(1824-1864)
1)수운은 신라 천년 고도인 경주에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양반가에 서자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 최옥은 63세에 30대 재가녀를 부인으로 취하여 수운을 낳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수운은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으나, 재가녀(再嫁女)의 자식인지라, 과거 시험 응시조차 할 수 없는 신분상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나이 약관 20세에 모든 재산이 불로 소실됨으로써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이에 수운은 자신의 운명의 타개책으로 상인의 길에 들어선다. 20대 근 10년을 전국을 보부상으로 떠돌면서 많은 세상 경험을 하게 된다. 30대에 집으로 돌아와 독서와 깊은 사색을 계속하던 중 세상일 깨치는 신비한 종교체험을 하게 되면서 창도한 종교가 동학이다.
2)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和定 永世不忘 萬事知: 하늘님을 모시면, 조화가 정해져서, 영원토록 하늘님을 잊지 아니하면, 만사를 다 알게 된다) 암송으로 동학은 시작한다. 사농공상으로 대별되는 철저한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여자와 노비마저도 똑같은 인간으로 평등하게 대접하여야 한다는 사상은 그당시로서는 혁명을 뛰어넘는 혁명이상의 사상이었다. 35세부터 포덕을 시작한 그의 사상은 철저한 신분 제사회인 조선으로서는 결코 받아들 수 없는 사상이었다. 수운은 3년 정도의 포덕을 계속하다가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경주 관하에서 목이 잘려 효수된다. - 해월 최시형(1827-1898)
1)수운의 동학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으로 이어진다. 2007년 임권택 감독 작품(극본 도올 김용옥)으로 <개벽>이란 영화가 상영되었다. 동학사상을 배경으로 해월 최시형(배우 이덕화 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린 영화였다.
2)원래 해월(아명: 최경상)은 수운과 같은 경주 출신으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막노동, 머슴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35세경 동학에 입도하게 된다. 깊은 신앙심과 능력만으로 동학 2대 교주로 발탁, 수운의 사후 신도들을 이끌게 된다. 그후 해월은 35년간의 긴세월을 동학 포교을 위한 기나긴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만민평등을 외치면서 소백산맥, 태백산맥,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를 떠돌면서 포교를 하게된다. 참으로 집념, 집념 그자체의 삶이 아닐수 없었다.
3)일화: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가 가장 먼저한 일은 집안의 사노비를 해방시킨 일이다. 그 중에서 해방시킨 두 계집종 중 한명을 자신의 수양딸로 삼고, 한명은 자신의 며느리로 삼은 일이다. 나아가 최시형을 후계자로 삼아 자신의 도통을 넘길 때 최시형의 신분이 머슴이었음을 생각할 때 진정한 신분타파를 몸소 실천한 대인(大人)이라 할 것이다.
4)그후 동학은 교세가 확장되어 1892년 삼례집회,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 1893년 10월 보은집회 등에서 수만명의 신도들이 운집하여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나아가 1894년 1월 전봉준(녹두장군) 고부군청을 습격한 것을 시발로, 남접과 북접이 서로 봉기하니 동학농민운동이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1894년 12월 동학운동은 진압되고, 해월은 다시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진력을 다하다가, 1898년 원주에서 내부자의 고발로 체포된다. 1898년 6월 교수형을 당하고,그의 시신은 광화문에 효수된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헛되지 않아, 그의 도통은 3대 교주 손병희로 이어지고, 약20년 후 3.1만세운동은 큰틀에서는 천도교(동학의 후신)의 주관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 정리하면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말은, 해월이 35년간 도피생활을 하면서 해월은 한번도 체포된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해월 자신의 뛰어난 지략도 있었겠지만, 동학교도를 위시한 조선민중의 뜨거운 성원이 없었다면 35년간의 도피생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사가 바뀌는 여명기에 동학을 지지해준 이름없는 민초들과 그의 후손들에게 가슴으로 존경의 인사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