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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여행 – 이호석 논설위원

꼭 10년 전 중국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다. 나는 지금까지 중국 여행을 대여섯 차례 다녀왔다. 갈 때마다 넓은 국토와 곳곳에 빼어난 풍광을 부러워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다 돌아온다. 여행이 모두 오래전의 일이라 지금은 간 곳의 풍광은 물론이고 어디를 다녀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2010년 3월 22일부터 4박 5일간 중국 절강성 포강현 의문정씨(義門鄭氏) 집단거주지인 ‘강남제일가’를 다녀온 것만은 잊히지 않는다. 이때의 여행은 관광을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서산정씨 문중의 초청을 받아 그들 종인 30여 명과 함께 큰 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그들의 초청을 받게 된 것은 그해 바로 석 달 전 내가 발간(편저)한 《조선조 비운의 큰 정치가 내암 정인홍》이란 책자가 인연이 되어서였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내암 정인홍 선생은 조선 중엽 사람으로 본관은 서산이며, 이곳 가야면 출신이다. 당대 조선에서 큰 선비인 남명 조식 선생의 수제자로, 광해군 때 북인의 영수(領袖)로서, 영의정까지 지낸 분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조선의 정치는 너무나 문란하고 관군도 지리멸렬하여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백성들이 전국 곳곳에서 창의하여 구국에 앞장섰다. 특히 이 고을 합천을 비롯한 영남 일원과 호남 일부에서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이는 주로 남명 선생의 경의(敬義) 사상을 교육받은 제자들이 앞장섰기 때문이다. 당시 내암은 57세의 나이로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고향에 있다가 임란(壬亂)을 만나 창의하고 의병 활동에 앞장섰다.
전국 의병들의 희생적 활동과 충무공 이순신의 빛나는 해전으로 선조 31년(1598년) 왜적이 물러가고 조선 정국은 안정되었으나, 1623년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일어나 내암은 88세 고령에 합천에서 도성으로 압송된 지 5일 만에 처형되었다. 반정군들이 내암에게 씌운 죄명은 인목대비 폐출과 영창대군 주검에 앞장섰다며 반역죄로 몬 것이다. 사후 이러한 죄명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고, 순종 2년(1908)에 죄명이 사해지고 신원(伸冤) 되었다. 당시 올곧은 정치인으로 온 국민의 추앙을 받던 내암을 살려두고는 반군들의 거사(擧事)가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내가 이 책을 발간한 것은 공직을 퇴직한 후, 향토사와 특히 내암 선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였다. 위와 같이 훌륭한 분으로 모든 죄가 사면되었음에도 아직 지역에서조차 반역했다는 정서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선생이 위상에 걸맞은 추앙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또 선생과 관련된 글들이 곳곳에 산만하게 실려 있고, 모두가 한문으로 되어 있어 대중들이 그를 접근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우선 지역민들에게 선생의 실체를 바로 인식시키기 위해 관련 글들을 한 권으로 모아 누구라도 보기 쉽게 한글로 번역하고 중요한 내용은 원문과 함께 실어 발간하였다.
서산정씨들이 매년 중국 절강성 ‘강남제일가’의 큰 행사에 참석하게 된 계기도 특별하다. 2001년 중국 형양에서 전 세계 정씨들을 대상으로 ‘정씨족계대전 편찬위원 회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 우리나라 서산정씨 대표들이 처음으로 참석하였고, 자기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끝에 절강성 포강현 ‘강남제일가’ 지역이 가장 가까울 것 같다는 조언을 듣고 돌아왔다. 다음 해 3월 서산정씨 문중 대표들이 ‘강남제일가’를 찾아갔다.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족보를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뒤지며 며칠을 고생한 끝에 그곳에 집단으로 사는 의문(義門)정씨와 서산정씨가 같은 뿌리란 것을 확인하였다.
서산정씨의 원조인 정신보(鄭臣保)는 송나라에서 상서형부원외랑의 벼슬에 있다가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설 때 배를 타고 고려로 망명을 와 충남 서산에 정착하였으며, 아들 인경(仁卿)이 서산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중국 강남제일가 지역의 의문정씨(義門鄭氏)들은 정신보의 증조 대에서 갈라진 후손들로 그 지역에만 2만여 명이 집단으로 살고 있었다. 의문정씨는 중국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씨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명나라 초 황제인 주원장(朱元璋)으로부터 극찬과 함께 ‘강남제일가’로 봉해졌다고 한다.
매년 3월 ‘강남제일가’에서 의문정씨 시조와 선조들의 제례 행사가 성대히 개최되고 있으며, 2002년부터 매년 서산정씨 대표 30여 명이 이 행사에 꼭 참석하였다. 나도 그해 행사에 함께 가게 된 것이다. 3월 22일 김해공항에서 항공편으로 출발하여 상해를 거쳐 중국의 포강에 도착하여 1박 한 후,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버스 편으로 남강제일가로 향했다. 목적지 20여 리 밖에서부터 도로변 곳곳에 ‘대한민국 서산정씨 환영’ 이란 현수막이 걸려있어 그들의 환영에 마음이 크게 설레었다.
현지에 도달하니 조금 떨어진 거리에 3, 4층 높이의 웅장한 기와집이 마치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모습으로 버텨 서 있고, 건물 상단 중앙에 ‘강남제일가’라는 현판이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그 뒤로 역시 고래 등 같은 웅장한 건물들이 즐비하여 마치 고궁에 온 듯하였다. 건물 앞 광장에는 2천여 명이 족히 돼 보이는 의문정씨 가족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고, 한편에서는 중국의 큰 행사 때마다 등장하는 사자 탈춤과 20여 미터나 돼 보이는 용춤 놀이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 앞에 우리들이 탄 버스가 멈춰 섰다. 많은 사람이 버스 주위로 우러러 몰려와 길 양옆으로 도열한다. 난생처음으로 그것도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큰 환대를 받는 것이 너무나 송구스러워 차에서 내리기조차 머뭇거려졌다.
우리가 도착하고도 그 화려한 식전 행사는 1시간쯤 이어졌고, 잠시 후 제례 행사가 시작되었다. 행사 시작을 보면서 또 한 번 놀랐다. 함께 간 서산정씨 대표들에게 먼저 예(禮)를 치르게 하였다. 서산으로 망명 왔던 신보(臣保) 할아버지가 그 문중의 종손이라 그의 후손인 서산정씨를 깍듯이 큰집으로 예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환영하고 우대하는 모습이 너무 감명 깊었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혈육이 무엇이기에 국적을 달리하며 이미 다른 민족이 된 수백 년의 시공간을 단번에 이어주고 저렇게 좋아하며 지낼 수 있을까. 그 신묘함을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것 같다.
2010년 3월의 중국 여행은 나에게 혈육(뿌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생각게 하였고, 평소 가까이에 사는 일가친척들에게 등한히 하며 사는 나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한 특별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