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지워지지 않는 촌놈 증표 – 이호석 논설위원
내 얼굴과 손에는 촌놈 증표가 서너 가지 있다. 이 증표는 도심(都心)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산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것들이다. 누구라도 내 얼굴과 손에 있는 이 증표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사연을 묻는다면 금방 나의 근본이 촌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먼저 남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얼굴의 증표부터 발생 사연을 이실직고 해야겠다. 나의 왼쪽 이마에 얼핏 봐도 눈에 띄는 작은 흉터 하나가 있다. 이 흉터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생겼다. 그때 우리 마을 안길은 모두 지게를 지고 다니는 좁은 흙길이었다. 곳곳에 돌멩이가 박혀 있고 제멋대로 만들어진 얕은 돌계단이 몇 군데 있었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마을 소꿉친구들과 바람개비를 만들어 추운 줄도 모르고 골목길을 종횡무진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그만 어느 돌계단 앞에서 자빠지면서 이마가 뾰족한 돌계단에 받친 것이다. 순간 그야말로 눈에 별이 뻔적했다. 응급 결에 일어나 이마를 만져보니 움푹 들어가 있고 피가 주르르 흘렀다.
그때 인근 우물에 물 길러가던 마을 초로의 할머니가 나를 발견하고, 바로 옆집을 쳐다보고 “아이고 큰일 났다. 이놈 이마가 깨졌다. 빨리 된장 좀 가져오너라.”며 고함을 질렀다. 이 소리를 들은 그 집 젊은 아주머니가 생된장 한 종지와 머리를 동여맬 끈을 가져 나왔다. 두 분이 함께 다친 부위에 된장을 뭉텅하게 부치고 머리를 싸매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무식한 치료 방법이다. 그때는 각 가정에 상비약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라 이런 일이 있을 때는 종종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 같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된장을 바른 후 바로 지혈이 되었는지 또 그 후 어떻게 나았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상처는 아물었고, 그날 생긴 이마의 흉터는 나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
그다음 증표는 나의 콧잔등 옆 흉터이다. 이 흉터가 생긴 사건은 내가 초등 4학년 때, 그것도 추운 겨울날이었다. 우리 집 옆에는 폭이 4~5미터쯤 되는 도랑이 있다. 도랑 양옆의 논들이 제법 높아 자연히 도랑이 깊었고, 겨울이면 얼음이 꽁꽁 얼었다. 도랑 바닥 전체가 큰 암반으로 드러나 있고, 곳곳에 완만한 비탈도 있었다. 그 위로 물이 천천히 흐르면서 겨울철에는 멋진 얼음판이 된다.
응달이라 얼음도 옆 논의 보리가 제법 푸르고, 개나리꽃이 필 무렵까지 오래 있었다. 비탈과 평지가 적당히 있어 겨울철 우리들의 놀이터로는 최고였다. 또래 친구들과 틈만 있으면 이곳에서 나무로 만든 스케이트를 타고 놀았다. 얼음 비탈을 힘들게 올라가 스케이트를 탄 채 쏜살같이 내려오는 재미는 특별했다.
어느 날이었다.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 질듯 잿빛 구름이 짙게 깔려있고, 도랑에는 동장군이 몰고 온 찬바람이 쌩쌩 부는 추운 날이었다. 나는 도랑에서 인근의 친구와 둘이서 추운 줄도 모르고 스케이트를 타며 놀았다. 여느 때처럼 얼음 비탈을 타고 내려오려고 스케이트와 송곳을 양손에 쥔 채 얼음 비탈을 기어오르다가 그만 미끄러지면서 앞으로 엎어졌다.
이때 정말 생각하기도 싫고, 글로 쓰기도 망설여지는 진짜 희귀한 사고가 발생 했다. 송곳 하나가 오른쪽 콧구멍으로 들어가 코와 얼굴 사이로 고쳐 있었다. 내가 응급 결에 송곳을 뽑았다. 스르르 빠져나올 때의 그 불쾌한 기분은 지금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같이 놀던 친구가 이 광경을 보고 기겁을 하고 우리 집으로 달려가 알렸다.
우리 집 사랑방에서 모여 놀던 아버지와 마을 어른 몇 분이 함께 달려 나와 난리가 났다. 그때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흐르는 피를 보고 덜컹 겁이 더해져 크게 울었다. 아버지가 솜으로 나의 한 쪽 코를 막고 자전거에 태워 2㎞쯤 떨어진 읍소재지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들어가 사정 얘기를 했더니 의사 선생님이 오늘 죽을 놈이 살아왔다며, 송곳이 조금만 안쪽으로 꽂혔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평생의 큰 액땜을 하였다며, 이놈 오래 살겠다고 농담을 하였다. 아버지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자세히 보면 지금도 코언저리에 그때의 상흔이 어슴푸레 남아있다.
그다음 증표는 나의 왼손 검지와 중지 손가락에 남아 있는 낫으로 베인 자국들이다. 이 정도의 상흔은 당시 농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을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소먹이 풀을 베면서 생긴 상처다. 어린 나이에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해도 서툰 낫질에 여러 차례 베이게 된다. 손가락이 베일 때는 그 아픔보다 이렇게 힘든 일을 시키는 아버지가 너무 밉고 원망스러웠다.
나는 가끔 그 당시의 일들을 생각한다. 골목 돌계단에서 이마를 다쳤을 때 나를 발견한 할머니가 우리 집에 알리지도 않고, 먼저 가까운 옆집에 고함을 질러 젊은 아주머니가 된장을 가져 나오게 하고 그것을 두 분이 마치 자기 아들, 손자인 양 정성스레 머리를 싸매주시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도록 고맙고 아름답다. 그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고맙다는 인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그분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들에게 정말 고맙고, 죄스러운 마음이다.
또 내가 송곳으로 얼굴을 다쳤을 때도, 풀을 베다 손가락이 베었을 때도 마을 어른들을 만나면 누구나 가족처럼 걱정하며 따뜻한 위로를 해 주셨다. 이 모두가 도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당시 유리처럼 맑은 하늘과 산소처럼 순백한 공기와 물, 초가지붕이 옹기종기 정겹게 모여 있는 그런 환경에서 마음껏 뛰놀다 일어난 일이었다. 깨끗한 자연과 그 속에 사는 천사 같은 마을 사람들의 두터운 정이 나의 모든 상처를 쉬 났게 해 주었지 싶다.
지금은 마을 전체가 어정쩡한 도시 흉내를 내고 있다. 사람들도 그때처럼 따뜻한 정이 없다. 간혹 그때의 정겹던 초가집들과 돌담 사이의 좁은 골목길, 그때의 사람들, 그때의 정이 새삼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