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역사다(20)| 역사 속의 문학 – 권길홍 수필가
역사 속의 문학
작년에 우리 합천의 합천호 관광농원에서 경남의 많은 문인들을 모셔놓고 성황리에 마쳤던 <찾아가는 경남문협세미나>가 지난 7월에는 거제에서 열렸다. 그 곳에서 이번 세미나의 주제였던 “유배, 한의 문학에서 흥의 문학으로”라는 내용에서 내 칼럼의 큰 제목인 <우리 모두는 역사다>라는 명제에 조선의 문인들이 문학을 어떤 자세로 표현했을까에 대한 조그만 답을 찾아낸다. 이서의 樂志歌낙지가,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다산 정약용의 도강고가부사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위 세 개의 가사가 역사 속에서 내가 평소 쓰려하는 내용과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에서 과감히 글로 옮겨보려 한다.
주최측에서 주선한 지심도관광을 가기 위해 새벽부터 부산을 떤다. 일행들을 삼가에서 만나고, 또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려고 시간 맞추어 가느라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거제로 달렸다. 코로나로 쫄았던 마음이 길을 달리면서 마주한 싱그러운 한여름의 울창한 산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
배에서 내려 바로 지심도를 오른다. 무성한 동백나무로 덮인 오솔길을 지나 탁 트인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거제 앞바다는 아름다웠지만, 지심도관광을 주된 목적으로 모인 게 아닌 우리들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장승포로 돌아와 바로 거제문화예술회관에서 세미나 주제강의를 듣는다. 주제발표하신 분은 전남도립대의 최한선 교수이다.
태종의 장자이며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의 증손자인 이서의 ‘내 뜻을 즐긴다’라는 시가인 樂志歌(낙지가 1523년)는 대표적인 체제 순응형의 글이다. 무려 14년간이나 본인과는 상관없이 형이 역모에 가담 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했음에도 조선의 제도를 찬양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유배의 환경에 순응하는 글로, 어쩌면 성리학이라는 조선이 떠받들었던 이념 가운데 왕에 대한 충성만을 추종한 지식인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서에게서 또 하나 체제개혁의 의지를 볼 수 없었던 건 비록 유배지라 하지만 그에게는 왕족으로서 외가가 바로 곁에 있고 외조부의 도움도 있으니 굳이 체제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이서의 현실타협적이고 나약했던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된다. 물론 역모를 일으킨다고 혐의를 두었던 이유가 관작이 낮다는 가장 속물적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왕족이면 좀 더 큰 이상으로 체제에 저항하거나 지배자들과 부딪쳐볼 수 없었을까? 이런 좀스런 이유로 당시의 집권자들과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쫓겨 내려와서는 완전히 비겁할 만큼 자신을 낮추었던 왕족 이서! 차라리 아무 일도 꾸미지 말고 조용히나 지냈으면 웃음거리를 면했을 텐데 자신의 관작 때문이라면 너무 시시하여 후대의 우리가 비웃어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1585년에 지은 가사, 조선의 조정에서 잘 나가던 벼슬아치로서 하루아침에 유배를 당하며 쫓겨났던 정철이 벼슬자리로의 복귀를 갈망하는 자신의 마음을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달랬던 건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명색이 벼슬을 한 사람이었고 권력을 쥐었을 때는 백성에 대한 책임을 졌던 사람이라면 그래도 자신이 표현했던 글에서 백성들의 궁핍하고 피폐한 삶이나 조선의 관헌들이 얼마나 백성을 쥐어짜고 못살게 굴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글에서라도 표현 했었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래도 경국제민을 모토로 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도록 성리학을 공부한 조선의 사대부가 그저 안빈낙도만 꿈꾼대서야 올바른 사고를 가진 양반이라 할 수 없지 않나?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신선의 세계를 평소에도 동경했다는 작가로서 우리 가사문학의 주옥같은 글이 대부분 송강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무지몽매한 백성에 대한 관심은 없이 문학에 대한 의미에만 집착을 한 문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조금은 답답하기도 하다.
물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답답한 현실의 도피를 위한 자기위안이 아닐까하는 변명을 대신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을 정도로 힘든 상황은 이해가 된다만.
이와는 반대로 정약용의 가문 전체가 조선의 체제에 저항하듯 천주교를 믿겠다고 작정한 후 형제와 사위가 참수되거나 유배되었던 이 시절에는 전정, 군정, 환곡 즉 삼정이 극도로 문란하여 백성들의 삶은 제대로 된 삶이 아니었다. 하나의 예로 남자들에게 부과되는 군포를 바치기가 힘들어 자신의 성기를 자르면서 군역의 의무를 피해가려 했던 조선의 백성들! 애절양이라는 시가에서 보듯 지방관리들이 모든 일에서 부정을 저지르고 백성을 힘들게 했다. 유민이 넘쳐나고 가진 자들이 관헌들과 결탁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괴롭히는 시절의 얘기를 정약용에 의해 도강고가부사는 1803년에 창작되었다. 문학으로 표현했던 정약용은 앞의 두 글과 비교하면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관직을 가진 양반이라는, 또 성리학을 배운 유학자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했다. 위 글에서 보듯 관리들이 삼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사회적 약자를 괴롭혀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지배계급에 대해서는 후세의 우리는 다른 인식을 해야 한다. 이 땅의 지식인 그룹이나 힘 있고 배운 자들의 자세가 바로 그들의 글에서 나타나듯 이서나 정철은 오로지 자신의 부귀나 안빈낙도만을 추구했으나, 글쓰는 문인들을 통해 가렴주구의 실정을 알게 된 후세의 우리들은 그 당시 조선의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당시의 사대부들과는 반대로 당시의 폐해를 드러나게 말로 표현하고 빈곤한 삶을 살았던 그래서 백성을 대변할 줄 아는 지식인으로서의 정약용은 문학을 넘어 개혁자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서와 정약용의 글은 거의 전부가 한문체의 글이고 정철은 특유의 가사체로 표현을 했지만 한문식의 글이 짙게 베인 글이라 당시의 백성들이 제대로 이해를 했을까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백성을 위하고 그들의 아픔에 크게 공감했던 정약용의 글에서도 모두 한문의 문장으로 글을 썼다는 건 당시 조선의 양반들이 가진 한글천대의 빗나간 사고를 나타내는데 이런 이유로 한글은 일반 백성들에게도 멀어졌지만 지식인그룹이라는 양반들도 우리 자체의 문화에는 무관심했다는 반증을 드러낸다.
정말 백성을 어여삐 여기고 사랑한 귀한 뜻이 이리도 받아들이지 않을 줄을 밤잠을 자지 않고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께서는 아실까?